극혐’이란 단어를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다. 온라인상에서 주로 사용되는 말로 ‘극단적 혐오’의 준말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혐오란 단어도 이미 깨나 부정적인 표현인데, 거기에 ‘극’을 붙여 의미를 더욱 극대화하고 있다. 그러나 어휘 자체에서 풍기는 극단성과 달리 실제로는 일상적이고 사사로운 분노를 표현하는 데 곧잘 사용된다. 연예인이 맘에 안 드는 태도를 보였다거나, 누군가 공공장소에서 무례한 행태를 보였다거나 하는 따위 말이다. 이십대 후배들을 보면 그 외에도 “빡친다”거나 “짱짱이다” 등과 같이 감정표현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온라인상에서의 경박한 언어습관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한 ‘감정을 담은 표상’들은 온라인상에 유포되면서 특정한 문화적 효과들을 양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일베’를 비롯해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생산되고 유포되는 각종 혐오와 비난, 조롱과 멸시의 정서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분노의 행방은 갈수록 설명하기 어렵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표출되고 있다. 단적으로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슬픔과 연민의 정서가 ‘감정적 피로’에 대한 호소와 유가족들에 대한 적대적 여론으로 돌변할 수 있으리라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우리는 어째서 사소한 일에도 극단적인 감정적 표현을 내뱉곤 하는 것일까.

 

관리되고 꾸며낸 ‘친절함’

 

우리 사회에 팽배한 분노의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개개인의 심리상태에 주목하는 것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기껏해야 개인을 도덕적으로 비난함으로써 감정을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산물이 아니라 개인의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특질로 환원할 뿐이다. 우리는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상태나 속성이 아닌 집합적으로 생산되어 전달되는 ‘표상으로서의 감정’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탈감정사회postemotional society’라는 개념을 제안하는 스테판 메스트로비치에 따르면 오늘날 감정은 문화적 맥락에서 추출되어 새롭게 인위적으로 고안된 사회적 맥락 속에서 통제되고 관리된다. 비단 인식만이 아니라 감정 역시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통제되고 조작된다는 것이다.


메스트로비치에 따르면 오늘날 서구사회에 현존하는 두 가지 지배적인 감정은 “응어리진 분노와 면밀히 관리되는 친절함”이다. 이러한 ‘친절함’은 철저하게 인위적으로 생산된 위선적인 감정이다. 특히 미국사회에서 친절함에 대한 문화적 강제는 타자지향적인 다문화주의적 관용의 분위기와 정치적 올바름의 숭배를 그 배경으로 한다. 문화적 맥락은 다소 상이하지만, 가치상대주의와 정치적 올바름은 우리사회에서도 어느덧 지배적인 가치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단일한 보편적 가치를 타자에게 강요할 수 없으며, 개개인이 상이한 문화적, 도덕적 가치에 헌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또한 정치적 올바름의 정신에 따라 타자의 정체성을 훼손하거나 불쾌감을 줄 수 있는 표현과 행위들을 삼가야만 한다. 타자를 대할 때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예의를 갖추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지배적인 사회적 공식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들 ‘친절한’ 젊은이들은 타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이들에게 “꼰대”라는 낙인을 돌려준다.


이러한 ‘친절함’은 내면적인 도덕적 원칙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합성되고 꾸며진 감정으로서, 위선적인 형태의 호의이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타자에 대한 배려에 근거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타자에 대한 염려에 의지한다. 오늘날 우리는 친절하지 못한 사람들이 인간관계로부터 소외당하기 일쑤며, 나아가 모든 직업에서 만인에 대한 친절함을 강요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감정을 다루는 자기계발서들의 공통적인 지침은 감정을 절제하고 합리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를 다스리고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나의 정신적 안녕과 사회적 성공을 위한 필수적인 덕목이다. 이때 친절함의 태도는 생존과 성공을 위한 실용적 방책의 성격을 갖는다. 게다가 친절함의 감정을 관리하는 데 있어 조언을 해줄 전문가와 서비스들이 언제든 준비되어 있다. 각종 파티를 주관해 주는 ‘플래너’ 산업을 이용하면 우리는 누군가에 대한 호의의 표현을 제도적이고 상업적인 방식으로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응어리진 분노의 과시

 

친절함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분노 또한 보편적인 도덕적 기준들과 완전히 절연되어 있고, 적절한 상황이나 대상과의 관련성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분노를 일으키는 현상들은 끝없이 이어지며, 그것들 간에는 아무런 질적 차이나 위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식당에서 불친절하게 주문을 받는 종업원, 커피숍에서 뜨겁게 제공된 커피, 동물학대하는 사람들, 북한 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분노하지 못할 대상이나 상황은 없으며,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마치 그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어떤 감정을 느꼈는가와 상관없이 내가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다.


감정의 연출은 미디어와 SNS의 보급으로 인해 지배적인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연예인은 물론 일반인들마저 방송에서 자신의 개인적 상처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다. TV에 방영되는 한 그 모든 감정적 표현들은 부분적으로 연출된 것임에 분명하지만, 훈련된 관람자로서 우리는 얼마든지 생생한 드라마를 경험한다. 감정적 표상들에서 도덕적 가치가 탈각되면서, 미디어는 집요하게 감정적 표상들을 재현하고 확산시킨다. 세월호 참사 당시 충격과 비탄에 잠긴 유가족과 생존자들에게 곧바로 카메라를 들이밀고, 경쟁적으로 감정적 장면들을 내보내는 데 주저함이 없던 것을 떠올려 보라. ‘동정심 피로’는 개인들이 느낀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기보다 미디어의 이러한 행태에 의해 증폭되고 강화된 측면이 적지 않다.


미디어에 의해 감정이 중개되고 소비된다는 것은 언제나 공개적 과시의 가능성을 수반하는 것이다. 분노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좋은 감정이다. 일베의 우익청년들은 사람들의 화를 돋우는 방법을 잘 알고 있으며, 전형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을 화나게 만든다. 그리하여 분노와 혐오의 표현은 또래집단의 인정과 공중의 주목을 자양분 삼아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된다.

 

위선과 진정성

 

내면적 원칙이 아닌 타자 지향적 의식에 따라 꾸며진 친절함의 태도와 형식적인 정치적 올바름의 원리는 자연스레 위선에 대한 인식과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일베’가 주로 정치적 올바름을 위반하는 용어 사용에 집착한다는 데에서도 단적으로 나타난다. 정치적 올바름은 겉으로 표현되는 용어와 행동의 교정에 천착하는데, 대체로 타자에 대한 포용보다 정치적·도덕적 심판의 수단으로 활용된다. 예컨대 우리는 이성적 관계를 둘러싸고 자연스러운 호감의 표현이 언제든 잠재적 범죄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경고를 주지 받는다. 그로 인해 정치적 올바름은 언제나 극단적 대립이라는 역효과를 야기한다. 우익청년들은 자유주의적 가치들을 그대로 돌려주는 방식으로, 정치적 올바름이 위선적인 이중성에 기초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지적한다. ‘극우적 가치’도 인정받아야 할 다원적 가치 중 하나이며, ‘일베’의 혐오 표현도 표현의 자유로서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한 위선적 예의바름과 ‘일베’의 위악적인 천박함은 동일한 사태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타자를 의식해 인위적으로 꾸며내는 위선적 감정들이 양산되면서 한편으로 진정성에 대한 열망도 더욱 커진다. 헌신과 감동,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이야말로 오늘날 우리를 가장 매혹시키는 감정들이다. 그러한 감정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고귀한 자질들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최근 유행하는 육아 프로그램들처럼 그와 같은 감정들조차 사회적으로 조직되어 제공된다는 점이리라. 오늘날 이러한 감정의 조작과 시뮬레이션은 정치적 대의에 대한 헌신과 집합적 열광 및 연대의식의 형성을 가로막는 주요한 방해물로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인식에 대한 저항과 더불어 감정에 대한 조작과 통제에도 비판적 시야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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