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시카고 커브스와의 경기에서 개인 첫 완투승을 결정짓는 순간.
오릭스 입단이후 첫 공개훈련.
이름 | 박찬호(朴贊浩) |
생년월일 | 1973년6월 30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충청남도공주시 |
출신학교 | 공주고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94년LA 다저스 |
소속팀 | LA 다저스 (1994 ~ 2001) 텍사스 레인저스(2002 ~ 2005)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5 ~ 2006) 뉴욕 메츠 (2007) 휴스턴 애스트로스 (2007) LA 다저스 (2008) 필라델피아 필리스 (2009) 뉴욕 양키스 (2010)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2010) 오릭스 버팔로즈 (2011 ~ ) |
1 국민영웅 ¶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큰 이력을 남긴 선수. IMF 때부터 지금까지 박찬호는 국민의 영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IMF 시절 TV를 틀면 박찬호와 박세리의 뉴스만이 오로지 웃음을 주던 때도 있었으니. 공식 홈페이지도 있는데, 주소는 http://www.chanhopark61.com/.
96mile 포심패스트볼
라이징패스트볼(이라고 읽고 실투라고 부른다)[1]
투심? 싱커?
슬러브
불같은 강속구[2]와 낙차 큰 커브로 '코리아 특급'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한때 LA 다저스의 1선발급 에이스[3]까지 올라갔던,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100승까지 한 한국 투수. 2001년에는 LA 다저스의 개막전 선발이었다. 주무기는 빠른 강속구와 파워 커브, 슬로 커브, 슬러브. 특히 파워 커브는 메이저 최고의 명품 구질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그외 오렐 허샤이저에게 전수받은 투심도 상당히 인정받고 있다.[4] 메이져 리그에 남은 마지막 올드스쿨 파워피쳐(80년대 스타일의 직구-커브 2가지만 가지고 승부보는 타입. 요새는 체인지업과 슬라이더가 없는 투수가 없다, 슬러브는 직구-커브 이외에 훗날 더한 것이다.)로 불리기도 하였다. 박찬호의 커브는 2000시즌과 2001시즌 2년 연속으로 메이저리그 단장과 감독들 선정 최고의 커브부문 3위를 했을 정도로 대단한 구질이었다. 내야수 출신답게 수비실력도 훌륭한데, 특히 번트 대처능력은 귀신급.
게다가 저 기록들은 소위 말하는 약물시대에 세운 기록이라 더욱 더 빛난다.
2005년에 결혼하였으며, 슬하에 딸 둘을 두고 있다. 부인은 박리혜씨로 세계 최고의 요리학교인 미국 CIA(보통 당황하기 쉽지만 예전에 다큐멘터리에도 나왔다...)를 졸업했다고 한다.
2000 - 2001 선발 투수 랭킹
위엄
전성기에는 그렉 매덕스, 랜디 존슨과 같은 은퇴해도 바로 명예의 전당에 들수 있는 레전드급 투수들 때문에 상대적으로 빛을 잃기도 했지만 전성기때는 리그에서도 2선발급 실력을 보유했던 선수다.[5]
탈삼진의 경우, 랜디 존슨에 이은 2위[6]를 마킹한 시즌이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LA다저스가 아닌 리그 중위권 수준의 팀에서 활약했을 시, 에이스로 활약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다저스의 1선발은 아니었지만 1선발급 수준이었다고는 주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 어짜피 투수의 탈삼진 능력에 부여하는 개개인의 평가는 상당히 다채롭고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이하는 개인의 판단에 맡긴다.
메이저리그에서 박찬호와 비슷한 수준의 통산 커리어를 보유한 선수로는 노모 히데오, 러스 오티즈, 댄 패트리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사한 선수가 노모 히데오. 실제로 선수 간의 커리어 유사성을 비교하는 Similarity Score가 952점으로 서로에게 가장 높은 점수다.
2.1 청소년기 ¶
공주고등학교에 재학했을 당시 청소년 대표로 미국에 간 적이 있었고 그 때부터 MLB에 대한 꿈을 가졌다. 공주고등학교 당시에는 4번 타자로 이름을 날렸지만 당시 초특급 유망주였던 조성민이나 임선동에 비해서는 그리 이름을 날리지 못했다. 고향 팀 빙그레와 계약금 5천만원에 거의 합의했으나[7] 어머니의 반대로 인해 한양대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한양대 2학년 시절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나가 활약했으며 이 때 애틀란타, 다저스, 양키스 등에서 오퍼가 들어왔으나 병역 문제등으로 인해 계약이 불투명해지는 상황까지 이르렀으나 대승적 차원에서 병역 문제 등을 눈감아주면서[8] 1994년 1월 11일 LA 다저스에 정식으로 입단하게 된다.
2.2 영광의 LA 다저스 시절 ¶
예외적으로 첫해에 바로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로 직행하는데, 이 기록은 당시 기준 17번째 진기록이었다. 그러나 역시 당시 구위로는 MLB에서 버티기 어려웠고 17일만에 바로 AA로 내려가게 된다. 이 당시 MLB 직행은 LA의 한국인들을 노린 마케팅이었다는 설도 적지 않게 들리고 있다. 이후 AA와 AAA를 거치고 난 뒤 1995년 9월 40인 로스터 확장에 맞춰 다시 MLB로 승격되었고 나름대로 쏠쏠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96시즌 시작 전 5선발 자리를 두고 여러 선수들과 경쟁하였으나 스프링캠프에서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5선발자리를 쉽게 차지하였다. 96년 4월 7일 컵스 원정에서 선발 라몬 마르티네스가 타석에서 부상을 당하자 바로 구원 등판하여 구원승을 따냈고 이것이 MLB 첫 승이었다. 4월 12일에는 말린즈와의 홈경기에서 첫 선발승을 따냈다.
97시즌에도 치열한 5선발 경쟁 끝에 선발자리를 꿰찼고, 8월 11일 컵스전에서 생애 첫 완투승을 기록했다. 시즌 성적은 14승 8패 ERA 3.38.
98시즌에는 더욱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7월에는 6경기 동안 42.2이닝, 4승 무패, ERA 1.05, 탈삼진 34개를 기록하면서 이달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시즌 직후 방콕 아시안 게임에 참가해 팀의 우승에 일조하였고 군면제를 받게 되었다.
99시즌에는 성적이 매우 안좋았다. 4월 13일 애리조나전에서 생애 첫 만루홈런을 맞았고, 그 유명한 한만두를 이 해 맞았다. 게다가 애너하임 에인절스 전에서 상대 투수 팀 벨쳐가 박찬호에게 욕설[9]을 하자 팔꿈치 가격 뒤 이단옆차기라는 기이한 싸움을 보였고 벤치클리어링 후 퇴장 당했다. 여러모로 다사다난했던 시즌.
00시즌에는 그야말로 에이스 모드...라고 하기에는 케빈 브라운이 강하긴 했지만 그래도 빼어난 모습을 보였다. 2000년 8월 25일 몬트리올 전에서는 생애 첫 홈런을 기록했고, 2000년 9월 30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전에서는 생애 첫 완봉승을 기록했다. 18승 10패 ERA 3.27의 최고의 성적.
이듬해인 01시즌에는 더욱 강력한 모습으로 올스타전에도 출전하였다. 그러나 칼 립켄 주니어에게 홈런을 맞았고 성적은 그리 좋지 못하였다. 또한 배리 본즈의 시즌 71, 72호 홈런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나 시즌 성적은 여전히 15승 11패 ERA 3.50으로 뛰어났다.
01 시즌 뒤 FA 자격을 획득했는데, 이 당시 다저스는 대런 드라이포트와의 희대의 먹튀 계약을 체결한 뒤라 박찬호를 붙잡을 돈이 없었고, 결국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하게 된다. 이 당시 박찬호가 부상을 숨기고 있었지만 텍사스는 그것을 몰랐고, 이는 텍사스와 박찬호 둘에게 매우 안좋은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2.2.1 다저스의 1선발이었는가? ¶
이 시절 박찬호는 그야말로 리그에서 10손가락 내에 꼽힐만한 성적을 냈다. 다만 몇몇 박빠들은 다저스 시절에는 팀의 1선발인 케빈 브라운은 거액을 주고 데려오자마자 드러눕는 바람에 실질적으로 박찬호가 팀내 최고 에이스였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케빈 브라운은 데려오자마자 드러눕지도 않았고, 오히려 이적 첫 해인 1999년에 252.1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3.00을 기록, 팀내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반면 박찬호는 194.1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5.23을 기록했다.
그 다음해인 2000년 역시 케빈 브라운은 230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2.58을 기록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다만 박찬호의 실질적 전성기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2001년 시즌에 케빈 브라운은 부상으로 인해 115.2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2.65를 기록하였다. 2001 시즌 케빈 브라운은 '콜라 등 카페인이 많은 음료를 많이 마셔 심장 박동에 이상이 생기는' 묘한 부상을 시작으로, 시즌 내내 부상에 시달렸다. 그 덕택에 2001 시즌은 개막전 선발을 포함, 박찬호가 사실상 1선발이었다. 참고로 브라운이 약을 빤 시기는 부상을 당한 01시즌 직후부터다. 그러나 정작 약빨을 받기는 커녕 더욱 성적이 하락해버리며 좋지 않은 끝을 보이고 말았다.
2.3 비상과 몰락, 그리고 재기 ¶
2002년 텍사스 레인져스와 5년 6500만불이라는 거액에 계약했다. 2001년에 FA로 대박 내보겠다고 부상을 안고서 투구를 했고 시즌 후에 그걸 알고 있던 다른 팀들에서는 영입 제안이 하나도 없었다. 그거 모르고 걸린게 텍사스 레인저스(...) 비싼 돈 주고 영입했더니 텍사스 레인저스로의 이적 전후 찾아온 부상으로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며 한국에서 한만두, 박먹튀라는 욕까지 먹고 있다. 미국 언론에서도 최악의 FA계약을 꼽을 때 모 본, 데런 드라이포드 등과 함께 항상 상위에 꼽고 있는 나쁜 계약으로서 그 이후 한동안 투수에게 장기계약을 하지 않는 분위기까지 불었다.
2005년 센디에이고 파드레스로 이적하면서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으며 2006년에는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시즌을 잘 소화해 나갔다. 하지만 원인 불명의 장출혈과 그 수술 그리고 이어지는 빈혈로 시즌 후반 로테이션에서 탈락하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 로스터에는 포함되어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 등판에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기도 하였다.
2007년에는 뉴욕 메츠와 계약하였으나 장출혈 후유증 등으로 아주 나쁜 모습을 보이며 방출되었으며 휴스턴 마이너에서도 상당히 나쁜 모습을 보여 재활의 전망을 어둡게 했다. 하지만 2008년에 올림픽 예선에서 호투하고 LA다저스와 계약한 뒤 상당한 구위 회복을 보였으며 시즌 초반 완전 재수[10]로 콜업되어 중간계투로 주로 활약하는 한편 선발투수로도 등판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2008년 6월 22일 드디어 오매불망 그리던 선발 출전에서 35도의 불볕더위 속에서 5이닝 1실점 9삼진의 놀라운 피칭을 보여줬으나 하필 상대 투수가 2007년 사이영상 수상자인 C.C. 사바시아. 사바시아는 5회까지 무결점 피칭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박찬호의 유일한 실점인 홈런도 쳐낸다(…). 그리고 박찬호가 마운드에서 내려가자마자 사바시아는 홈런을 허용하였다. 흠좀무. 이래저래 안습이다.
2009년엔 다저스를 떠나 필라델피아와 최소 250만, 최고 500만 달러라는 불황치고는 짭짤한 메이져 계약을 해냈다. 조건은 5선발 후보로 경쟁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 시즌 초에는 5선발로 선발출장했지만 1승만 거두고 중간계투 요원으로 돌아섰다. 중간계투로 전환한 뒤에는 구원승과 여러차례 홀드를 기록하며 선발로 나섰을 때보다 구위가 상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36살에 95마일을 던지는 위엄
박찬호의 선발 부진의 원인에 대해 일각에선 부상설을 제기하였지만 워낙 예민한 성격의 박찬호가 주변의 과도한 기대에 대한 부담감과 선발투수로 확실히 부활하겠다는 일념이 너무 지나쳐서 도리어 부진했던 이 아니냐는 시각이 제일 근접한 설명인 것 같다. 실제로 선발에서 탈락하고 릴리프로 전환하면서 상당히 좋은 피칭을 보여주고 있으며, 본인도 부담감이 적어 좋은 피칭이 나오는 것 같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여담으로 불펜으로 돌아선 덕분에 MLB 네트워크에서 방송중인 'The Pen'(필라델피아 불펜 선수들의 일상을 다룬 프로그램이다)에 2회부터 자주 출연하고 있다. 불펜 동료들과 있을때 특유의 말투로 한두마디 툭툭 던지곤 하는데 상당히 재미있다.
'불펜 에이스'라는 칭호를 들으며 롱 릴리버로서 무피홈런, 삼진/볼넷 비율 10 이상 등의 황금 스탯을 자랑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9월 16일 경기에서 병살타로 이닝을 마감하던 공을 뿌리다 다시금 오른쪽 햄스트링 부상이 도졌다. 1994년에 MLB에 진출하여 PS에 던진 경험이라고는 2006년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에서 던진 패전처리용 2이닝 뿐. 세상을 향해 법규를 날린 남자가 가진 두 개의 우승반지를 보면 이래저래 부러워 할 수 밖에 없을 듯. 부상을 이겨내고 PS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길 기대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
그리고 필라델피아의 내셔널리그 챔피언쉽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기록상으로는 1패에 방어율이 8점대를 찍어 매우 좋지 못하지만, 결정적 위기 상황을 잘 모면했다. 특히 LA다저스 클린업 트리오를 삼자범퇴시켜 게임을 승리로 이끈 NLCS 1차전은 그 중 백미.
그렇게 악의 제국과의 월드시리즈 맞대결을 펼쳐 신종플루에 걸린 상태에서 4게임에 등판해 3.1이닝 동안 2피안타 무실점으로 활약해, 작년과 다른 모습을 보이던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불펜에서 스캇 에어와 함께 그나마 체면치레를 해준 유이한 선수가 되면서 길었던 2009년 시즌을 마무리했다.
2010년 계약발표 당일까지 언론에서는 마치 시카고 컵스와 계약할 것처럼 이야기가 흘러나왔는데, 모든 사람들과 기자들의 예상을 뒤엎고 뉴욕 양키스와 계약했다! 절대반지월드시리즈 우승반지 득템을 위한 선택으로 추정된다. 계약조건은 1년에 기본 120만달러 + 보너스 30만달러로 선발이 아닌 불펜투수로 뛴다.
등번호는 이번에도 61번. 외야수 그렉 골슨이 자신의 등번호였던 61번을 포기하고 27번으로 바꾸면서 박찬호는 다시 양키스에서도 자신이 매번 달아오던 61번 번호를 달고 뛸수있게 되었다.
2010년 4월 5일 펜웨이 파크에서 열린 레드삭스 원정에서 더스틴 페드로이아에게 좌월 2점 홈런을 맞고 뒤이어 케빈 유킬리스에게 그린 몬스터를 맞추는 2루타를 허용한뒤 강판당했다. 설상가상으로 뒤이어 올라온 다마소 마떼와 포사다 배터리는 2연속 폭투를 범하며 유킬리스는 득점. 마떼야 뭐하는거니. 결국 7:9로 양키스는 패배했고 박찬호는 패전의 멍에를 썼다. 가뜩이나 승리투수는 히데키 오카지마...
4월 8일 경기에서는 1:1 스코어에서 7회에 등판하여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고, 연장 10회초 양키즈가 커티스 그랜더스의 솔로홈런 등 2점을 추가, 10회 말 마리아노 리베라의 세이브에 힘입어 통산 121번째 승리를 기록하였다.
4월 16일 에인절스전에서 몸을 푸는 도중 오른쪽 햄스트링에 통증을 느꼈고, 바로 15일 DL행. 박찬호는 개인 홈페이지에서 갑작스럽게 부상을 당한 이유에 대해서는 "늦게 계약해 약간은 정신없이 새로운 팀에 적응하고 시즌 준비 또한 서둘러 하다 보니 좀 바쁘게 달린 것 같다"고 설명했다. 복귀를 위해 25일에 양키스의 스프링캠프가 있는 플로리다에서 재활에 매진하였으나 여전히 오른쪽 햄스트링 뒤틀림이 낫지를 않아 재활을 중단하였다.
결국 복귀 후에도 높은 피장타율을 보이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코칭스태프의 눈밖에 나 트레이드설이 흘러나왔고, 8월 1일자로 방출되면서 4일 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가 클레임을 걸어 피츠버그로 이적, 빅리그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웨이버 공시기간이 지나 FA로 풀릴 경우 영입을 원하는 템파베이와 세인트루이스에 뺏길 것을 염려한 피츠버그가 대담(?)하게 나서 데려간듯 싶다. 하위 팀이기는 하지만 팀의 중심을 잡아줄 베테랑 투수로써 데려갔으니 어쩌면 양키스에 있을 때보다는 나을지도 모르겠다. 우승반지는 좀 더 참아야 할 듯.
어쨌든 온갖 고난 끝에 9월 13일 드디어 123승 97패의 아시아 최다승 타이기록을 이루었다! 그리고 10월 2일 플로리다 말린스와 원정 경기에 3-1로 앞서던 5회말 구원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3이닝 무실점 호투로 시즌 4승째를 거두면서 124승 97패 아시아 최다승 기록을 경신하였다!
흔히 말하는 박까들은 노모 히데오의 123승 109패와 비교하며 박찬호를 까기 바쁜데, 두 선수 모두 인고와 영욕의 시간을 보내며 이루어 낸 결과다. 누가 더 낫니 나쁘니 할 필요가 없는 두 선수 모두 아시아의 자랑이다.
최다승을 경신한 후 한화 이글스로의 복귀를 원한다는 발언을 했는데, 한화팬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의견은 "한국에서 마무리 잘하자."와 "그냥 미국에서 깔끔하게 은퇴하자."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11] 다만 공통적인 의견은 "국내에 와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원자단위로 까이는 건 원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2010년 시즌을 마치고 향후 진로를 놓고 가족이 허락한다면 국내에서도 뛸 수 있다는 의사를 피력하는 등 여러 의견이 오갔지만 결국 메이저리그 4개 구단에서 박찬호와의 계약에 흥미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고, 박찬호 본인 역시 한 번 더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까닭에 기자회견을 열어 2011년에도 메이저리그에서 뛰겠다는 사실을 밝혔다.
하지만 2010년 12월 20일 스포츠조선 단독보도로,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버팔로즈로 갈 예정이라는 기사가 났다. 기자회견을 할 예정. 사실이라면 이승엽과 한솥밥을 먹게 될 것이다. 여러 야구관련 커뮤니티는 카오스 상태….
오릭스 행이 확정인 것 같다. 오릭스 측의 보도자료가 공개된 상태. 계약기간은 1년이고 등번호는 그대로 61번. 오릭스가 현지에서 가장 인기 없는 팀이긴 하지만 이승엽과의 시너지 효과로 국내에선 파급력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오릭스 팬 여러분 최고의 투수를 영입했습니다.
# 그리고, 그토록 염원하던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는 결국 영영…….그래도 일본시리즈와 한국시리즈가 있으니까….
# 그리고, 그토록 염원하던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는 결국 영영…….
2.4 새로운 도전, 2011 오릭스 시절 ¶
2011년 3월 6일 주니치와의 시범 경기를 가졌는데 실적은 4이닝 5실점. 이에 네티즌들에게 쫌 까였다. 하지만 이와는 상관 없이 박찬호 자신은 이번 성적에 일단은 나름대로 만족한 모양이다. 일단은 계획대로 80구를 던져서 그중 51개는 스트라익을 만들었고, 탈삼진 5개에 사사구 2개가 4이닝동안 5실점하고 교체 될때까지 낸 성적인데 일단 박찬호 자신은 뭔가 자신감을 얻은 듯한 뉘앙스를 주고 있다. 게다가 일단 자신도 일본 타자들을 더 연구하여 기록을 높이겠다고 한만큼 아직 무조건 힐난만 할 상황은 아니다.
게다가 시범경기때 한번 푸닥거리한번 하고 본 시즌 들어가서 잘나가는 선수들도 있으니 일단은 진드감치 기다려보자.
그렇게 시범경기 선발등판에서 죽을 쑤던 것도 몇번이였을까…. 3월 21일 쿄세라돔에서 열린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등판, 53개의 공을 던지고 볼넷을 한개도 내주지 않고 딱 3피안타만 허용하며 총 4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그의 위기 관리능력과 구위가 상승한 것을 본 팬들은 이제야 몸풀렸구나!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중.
4월 2일 있었던 프로야구12개팀 자선경기에 선발로 출전, 상대는 지바 롯데 마린즈로 해당 팀에서 활약하는김별명김태균과의 투타대결이 화재를 모았다. 하지만 보크를 6개나 범하면서 페이스가 무너져서 인지 6이닝에 포풍실점...일단 투구와 볼끝은 좋았다지만 아무래도 현재로써 가장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보크문제 일듯…. 10년 넘게 미국에서 야구생활을 하다가 규정이 더 세밀한 일본야구의 보크 규정에 발이 많이 묶이는듯 하다.
4월 2일 있었던 프로야구12개팀 자선경기에 선발로 출전, 상대는 지바 롯데 마린즈로 해당 팀에서 활약하는
결국 여러가지 불안요소가 노출되면서 아쉽게도 개막전 선발투수 자리는 기사누키 히로시에게 돌아갔다.
4월 15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전에 정규시즌 첫 선발 등판했다. 마쓰이 가즈오에게 선두타자 홈런을 허용하면서 불안하게 출발했으나, 오릭스 수비진의 도움과 베테랑다운 위기관리능력을 십분 활용하며 6.2이닝 3실점으로 역투했다. 7이닝 가까이 던지면서 투구수가 고작 83개였을 정도로 투구수 관리도 적절했다. 하지만 라쿠텐의 에이스인 다나카 마사히로의 구위에 오릭스 타선이 완전히 발리면서 패전투수가 된다. 이 날 경기에서도 보크를 하나 범했지만, 본인이 수긍했다니 앞으로 신경만 쓴다면 큰 문제는 안 될 듯 하다.
4월 22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전에서는 7이닝동안 3피안타 4볼넷 6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하여 일본에의 첫 승을 거두었다. 거기에 이날은 부진하던 이승엽이 몸을 던져 안타와 점수를 뽑아내어 팬들을 열광시켰다.
4월 29일, 이번에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의 다나카 마사히로와 선발 맞대결을 펼쳤다. 2회에만 5안타를 맞으며 3실점했지만, 그외에는 특별한 위기없이 8회까지 완투. 그러나 이번에도 오릭스의 타선이 9회까지 완투한 다나카의 구위에 발리면서 1득점에 그치는 바람에 완투패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나마 1득점도 병살타구가 실책으로 타자가 살아서 얻은거다. 이쯤되면 오릭스에게서 한화의 향기가 난다 이 날의 기록은 8.0이닝 9피안타 3실점 0볼넷(!) 4삼진 (110구).
어린이날인 5월 5일에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전에 선발 등판하지만 잦은 실투를 범하며 5이닝 7피안타 5실점으로 부진, 패전투수가 된다. 이날도 오릭스 타선은 당연히(…) 무득점으로 침묵.
5월 11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6이닝 4실점으로 또 패전투수가 되었다. 잘 던진 편이었지만 6회에 맞은 홈런이 뼈아팠다. 이 날 팀타선은 간만에 터졌으나 터졌다고 하기도 애매한게 3득점이니….
근데 이걸 이유로 감독이 박찬호를 2군으로 내려보냈다. 최근 2경기 부진하긴 했지만 아주 부진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고 선발투수로서 꾸역꾸역 이닝까지 잘 챙기고 있는데 2군 통보는 해도 너무한다는게 대다수의 의견이다. 며칠 전 이승엽의 2군행까지 엮여서 감독이 한국까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오기도. 그런데 이승엽은 2군가는게 워낙 당연한 성적이다.[12]
박찬호의 2군행은 현재 오릭스의 답이 없는 타선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자세한 내용 참조. 이런 운영이 가능한 것은, 일본리그의 교류전 일정이 워낙 괴상하게 짜여져 있는데다가 상대적으로 성적압박이 덜한 교류전이다보니 다음 등판을 기다리는 선발투수를 1군에서 말소해 일정을 미룬뒤 그 스판에 타자들을 구겨넣어 대타라도 보강하는 필사적인 득점력 강화책이라는 지적이다. 선발 밑장빼기의 진수 어차피 박찬호가 파리그 선발투수들중에는 방어율 뒤에서 4번째인 투수라 필승카드는 아니기 때문. 그래서 다음 등판은 1군 말소후 10일 규정이 적용되는 5월 22일 일요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전이 될 전망이다.
그리고 5월 2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을 앞두고 이승엽과 함께 1군에 복귀, 요미우리전에 선발 등판한다. 다양한 변화구를 바탕으로 한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6이닝 3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7회초 공격에서 대타로 교체되었고, 그 회에서 오릭스가 한 점을 뽑아내면서 박찬호는 승리투수 요건을 갖춘다. 하지만 9회말 오릭스의 마무리 기시다 마모루가 야노 켄지에게 동점 적시타를 허용하면서 박찬호의 승리는 물거품이 된다.(...) 일단 잘 던졌다는 것에 위안을 삼자.
이후 경기 소식 추가바람
4 이야깃거리 ¶
예상 외로 타석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어 가끔씩 홈런을 치곤 한다. 연장 13회 때 선발출장한 투수를 대신하여 '대타' 박찬호가 나서는 일도 있었다. 흠좀무. 가장 최근 기록을 보자면 09/04/26 vs플로리다전에서 홈런을 쳤다. 그것도 밀어서….[15] 시즌 타율은 투수 중에서도 높은 편인 1할 대 후반에서 2할 타율을 기록했다. 그리고 보내기 번트 능력은 메이저리그 투수 중 정상급이다.
사실 잘 믿기진 않지만 대학교시절의 박찬호는 국가대표 4번타자였다. 물론 출신고등학교인 공주고에서도 4번타자. 고교야구에서는 강타자의 수비 위치가 투수인 경우가 종종 있다.
전형적인 슬로우 스타터다. 전성기 때 시범경기 성적이 썩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기어코 10승 이상을 올리는 활약을 보여줬다. 시즌 초인 4~5월에 난타를 당하는 경기를 자주 보여주다가 6월 하순부터 발동(?)이 걸리기 시작, 7~8월은 리그 특급 투수의 성적을 찍어줬다.(…)
상대성적이 강한 팀이나 강한 타자에게는 여지없이 개발살 내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반대의 팀이나 타자에게는 여지없이 개발살 당한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는 시카고 컵스, 밀워키 브루어스, 제프 켄트. 그리고 후자의 대표적인 예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미네소타 트윈스, 배리 본즈.근데 약하기 전이나 후에나 본즈한테 강한 투수가 몇명 있기나 했나?
희한하게도 그가 공을 잘 던지면 나라가 곤경에 빠진 증거라는(…) 설이 있다. 그냥 웃으면서 넘기기에는 참 미묘한 시기에만 잘 던지는 것이 또 나름의 아이러니.
전성기였던 90년대 후반 대한민국 광고계의 블루칩이었다. '익사이팅'이라는 본격(?) 스포츠 껌의 광고 모델이기도 했고, 그리고 그 유명한 삼보컴퓨터의 체인지 업의 모델이기도 했다. 또한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찔러 그의 이름을 딴(?) "찬호박"이라는 이름의 호박맛 아이스크림도 있었다.
경인지역 민영방송의 밥줄이었다. iTV 때도 그랬고 OBS도 MLB중계를 시작했다. 그러나 돈이 안되서 결국 2010시즌의 중계권은 포기하는듯 보였으나 결국 다시 중계를 시작했다. 2010시즌 중계권을 소리소문 없이 구매해서 잘 방영하고 있다. 다만 추신수 위주의 중계방송을 시도하는지라 박찬호의 비중은 많이 줄어든 상황.
06WBC 일본전에 던진 박찬호의 공을 보고 일본 기자들이 "변화구를 많이 던진 것이 아니냐"라고 질문하자 박찬호가 "오늘 변화구는 던진 적 없고 투심 던졌다."라고 대답한 일화도 있다. 그만큼 공의 변화가 엄청났다는 얘기.
또 사족으로 일본의 마쓰이 히데키의 천적이다. 통산 전적에서도 마쓰이가 박찬호를 상대로 단 한개의 안타를 쳤을뿐[16] 거의 밥이라고 할 정도로 마쓰이에게 강하다. 실제로 마쓰이는 박찬호의 공은 도저히 칠수 없다.라고 이야기 한 적도 있다.
부인이 요리사라는 사실을 두고 DC인사이드 야구갤러들은 박찬호 선발 경기에서 특별한 활약을 보이는 선수(박찬호의 선발승을 위해 적시타나 홈런, 호수비 등을 하는 팀원이나 결정적 에러로 상대방 팀분위기를 일순에 꺾는 상대팀원)를 '박사장 회식 초청자 명단'에 추가하기도.
2009년 초 1박 2일에 출연해 여전히 많이 남아있던 박까들을 팬으로 전향시키는 기적을 실천하기도 했다.
09년 월드시리즈때 독감에 걸린채로 등판되었다고 보도가 되었으나, 실제로는 신종플루였다는것이 본인 입에서 밝혀져서 대인배로 칭송중.
특이하게도 박찬호는 아직까지 미국 영주권이 없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많은 외국인 선수들이 구단의 협조까지 받아가면서 영주권을 취득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메이저리거라는 신분이 보장되는 확실한 직업이 있어서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금방 딸 수 있다. 그런데 박찬호는 어차피 한국에서 선수생활을 끝낼 것이기 때문에 영주권을 따지 않았다는 식의 기사가 나온 적이 있었지만 정말인지 여부는 불분명. 어쨌든 이 때문에 계약이 새로 갱신될 때마다 노동비자를 새로 발급받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다.
뉴욕 양키스의 투수 조바 체임벌린이 박찬호의 설사 인터뷰를 듣고 폭소했다. 그리고 "박찬호는 오랜 시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뛰어난 투수였다. 어렸을 때 나는 박찬호의 투구를 자주 봤다. 그의 팬으로 나는 성장했다. 그런데 이제 같은 팀 불펜에서 선수생활을 한다는 것이 기쁘다"라고 말했다.
노모 히데오에게 메이저리그 시절 포크볼을 알려달라고 한적이 있었는데, 노모 히데오가 거절했다고 한다. 이유는 내가 너의 패스트볼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포크볼따윈 배우지 않았을꺼야라고. 오릭스에 가서도 포크볼을 배우려고 하는 건 여전하다. 결국 오릭스의 동료 선발투수에게 체인지업을 가르쳐 주고 그에게 포크볼을 배우려고 로비하는중이다.이봐요….
이에 팬들은 아무리 포크볼 배우고 싶어도 그만의 비기를 가르쳐 주며 얻으려는 것은 좀 위험하지 않냐고 걱정하고 있지만, 한쪽에서는 아무리 같은 체인지업이라도 박찬호표 체인지업과 다른 선수의 체인지업은 질적으로 다르며 설마 아무리 박찬호라도 자기 밥줄을 쉽게 남에게 알려주겠냐면서 속알머리 몽땅 내주고 포크볼을 배울리는 없다고 하는쪽으로 나뉘어 키배질 아닌 키배질을 하고 있다.
도호쿠 대지진으로 일본 사회가 흉흉한 가운데, 3월 15일자로 피해지역 지원금 모금에 1천만엔을 기부했다고 발표 하였다. 배용준에 이어 기부발표에 대해, 일본내 야구팬들은 크게 감사하고 있는 반응. 대인배로 추앙받고 있다. 그리고 같은 일본 야구계 선수들은 왜 기부금 안내냐고 자국 프로선수를 까는 훈훈한 상황이.(…)
메이저리그 생활은 이미 청산한지 오래라고 한다. 근데 좀 요상한게 본래는 오릭스에 입단하는게 아니라 고향팀인 한화로 오고 싶었다고.
하지만 오는데 여러가지 병신력 넘치는 규정이 산재해 있는 바람에 이도저도못하다가 일단 처가가 있는 일본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하지만 오는데 여러가지 병신력 넘치는 규정이 산재해 있는 바람에 이도저도못하다가 일단 처가가 있는 일본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5 국제대회 ¶
국제대회에 굉장히 강해서 상대하는 나라들을 다 바르고 다녔다. 심지어는 공의 위력이 텍사스 시절 이후 가장 약화되었다는 06년에도 다른 나라 타자들이 손 한번 못댄 정도(...) 특히 06 WBC때 코치나 해설가 할거 없이 박찬호의 체인지업 위력이 완전 떨어져서 공을 던지면 난타 당할거란 예상을 내놓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체인지업으로 관광 보내버렸다.[17]
박찬호의 국제대회 성적은 다음과 같다.
1998 방콕 아시안게임
예선전 vs 대만 : 5이닝 1실점 승리투수
예선전 vs 대만 : 1.2이닝 0실점
결승전 vs 일본 : 7이닝 1실점 승리투수
예선전 vs 대만 : 5이닝 1실점 승리투수
예선전 vs 대만 : 1.2이닝 0실점
결승전 vs 일본 : 7이닝 1실점 승리투수
2006 WBC
예선1라운드 vs 대만 : 3이닝 0실점 세이브
예선1라운드 vs 일본 : 1이닝 0실점 세이브
예선2라운드 vs 멕시코 : 1이닝 0실점 세이브
예선2라운드 vs 일본 : 5이닝 0실점
예선1라운드 vs 대만 : 3이닝 0실점 세이브
예선1라운드 vs 일본 : 1이닝 0실점 세이브
예선2라운드 vs 멕시코 : 1이닝 0실점 세이브
예선2라운드 vs 일본 : 5이닝 0실점
2008 베이징 올림픽 예선
예선전 vs 대만 : 3이닝 무실점
예선전 vs 대만 : 3이닝 무실점
저 2실점도 알루미늄 배트가 허용되었던 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잃은 것. 하지만 어쨌거나 위에 기록이 보여주듯이 '합법적 병역브로커'의 첫 주인공 겸 일원이자 큰형으로서[18] 그를 포함한 수많은 국내파 선수들에게 병역특례를 선물한 주역 중 하나.
6.1 좋은 기록들 ¶
- 1994년 LA 다저스 입단. 그 해에 NL에서 두번째로 어린 선수였음 (만 21세)
- 1997년~2001년 5년 연속으로 13승 이상 기록
-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 대표팀(드림팀 I) 소속으로 금메달 (군면제)
- 2000년 18승 10패, 방어율 3.27, 226이닝 기록. 다승 NL 5위
- 2000년 피안타율 6.89개 - NL 1위 (다만 피출루율은 NL 10위권 밖)
- 2000년 삼진 217개 - NL 2위
- 2001년 35경기 선발 출전 - NL 1위 (15승 11패, 방어율 3.50, 234이닝)
- 2001년 올스타전 출전
- 2001년 삼진 218개 - NL 3위
-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4경기 출전해서 방어율 0.00, 3세이브 기록
- 2009년 월드 시리즈에 4경기 3.1이닝 등판해서 방어율 0.00 기록
- 홈런 총 3회 기록
- 2010년 9월 13일까지 메이저 리그 통산 123승 97패, 아시아 최다승 타이기록.
- 2010년 10월 2일 124승으로 아시아 선수 최다승 달성.
6.2 영 안좋은 기록들 ¶
- 1999년 세인트 루이스 카디널스의 페르난도 타티스 Jr.에게 한 이닝 만루홈런 2회 기록(……), 팀 벨처에게 팔꿈치 가격 뒤 이단옆차기 시전.
- 2001년 마크 맥과이어의 70개를 뛰어넘는 배리 본즈의 홈런 기록 71호, 72호 상대 투수(…) 본즈는 다행히도(?) 다른 투수에게 73호 홈런을 날렸다. 여기에 올스타전에서 칼 립켄 주니어에게 홈런을 맞았다[19].
- 2001년 데드볼 20개 - NL 1위(…)
- 2002년 데드볼 17개 - AL 1위(…)
7.1 메이저 리그 시절 ¶
1994년 2경기 등판
1995년 2경기(1경기 선발) 등판
1996년 48경기(10경기 선발) 108⅔이닝 5승 5패 119탈삼진 평균자책 3.64
1997년 32경기(29경기 선발) 192이닝 14승 8패 166탈삼진 평균자책 3.38
1998년 34경기(34경기 선발) 220⅔이닝 15승 9패 191탈삼진 평균자책 3.71
1999년 33경기(33경기 선발) 194⅓이닝 13승 11패 174탈삼진 평균자책 5.23
2000년 34경기(34경기 선발) 226이닝 18승 10패 217탈삼진 평균자책 3.27
2001년 36경기(35경기 선발(1위)) 234이닝 15승 11패 218탈삼진 평균자책 3.50
2002년 25경기(25경기 선발) 145⅔이닝 9승 8패 평균자책 5.75
2003년 7경기(7경기 선발) 29⅔이닝 1승 3패 평균자책 7.58
2004년 16경기(16경기 선발) 95⅔이닝 4승 7패 평균자책 5.46
2005년 30경기(29경기 선발) 155⅓이닝 12승 8패 평균자책 5.74
2006년 24경기(21경기 선발) 136⅔이닝 7승 7패 평균자책 4.81
2007년 1경기(1경기 선발) 등판
2008년 54경기(5경기 선발) 95⅓이닝 4승 4패 2세이브 5홀드 평균자책 3.40
2009년 45경기(7경기 선발) 83⅓이닝 3승 3패 1홀드 평균자책 4.43
2010년 53경기(0경기 선발) 63⅔이닝 4승 3패 3홀드 평균자책 4.66
1995년 2경기(1경기 선발) 등판
1996년 48경기(10경기 선발) 108⅔이닝 5승 5패 119탈삼진 평균자책 3.64
1997년 32경기(29경기 선발) 192이닝 14승 8패 166탈삼진 평균자책 3.38
1998년 34경기(34경기 선발) 220⅔이닝 15승 9패 191탈삼진 평균자책 3.71
1999년 33경기(33경기 선발) 194⅓이닝 13승 11패 174탈삼진 평균자책 5.23
2000년 34경기(34경기 선발) 226이닝 18승 10패 217탈삼진 평균자책 3.27
2001년 36경기(35경기 선발(1위)) 234이닝 15승 11패 218탈삼진 평균자책 3.50
2002년 25경기(25경기 선발) 145⅔이닝 9승 8패 평균자책 5.75
2003년 7경기(7경기 선발) 29⅔이닝 1승 3패 평균자책 7.58
2004년 16경기(16경기 선발) 95⅔이닝 4승 7패 평균자책 5.46
2005년 30경기(29경기 선발) 155⅓이닝 12승 8패 평균자책 5.74
2006년 24경기(21경기 선발) 136⅔이닝 7승 7패 평균자책 4.81
2007년 1경기(1경기 선발) 등판
2008년 54경기(5경기 선발) 95⅓이닝 4승 4패 2세이브 5홀드 평균자책 3.40
2009년 45경기(7경기 선발) 83⅓이닝 3승 3패 1홀드 평균자책 4.43
2010년 53경기(0경기 선발) 63⅔이닝 4승 3패 3홀드 평균자책 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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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투구 모션 보면알겠지만 다른 투구폼은 공을 던지고 나서의 폼이 안정적이지만 저 폼은 발이 살짝 미끌어 지는 듯한 모션.[2]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가장 위력적인 패스트 볼을 던진 아시아인 선발 투수다. 그 누구와도 비교가 안될 무브먼트와 구속의 하모니는 박찬호의 전성기로부터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어떤 아시안 투수도 보여 주지 못했다.
[3] 케빈 브라운 때문에 에이스까지는 차지 못했지만 그래도 다른 중하위권 팀에서는 에이스 노릇해도 이상하지 않은 성적이었다.
[4] 미국 폭스TV 중계방송 당시 아나운서가 박찬호의 투심을 보고 '저런 투심은 플레이스테이션2에서나 볼수있다.'라며 칭찬하기도 하였다.
[5] 굳이 2선발급 실력이라고 표현한 것은 박찬호가 텍사스 시절 1선발이었던 때가 있었지만 그에 걸맞는 성적을 올리지 못했고, LA 다저스 시절 2선발로 활약했을 때에도 1선발인 케빈 브라운을 압도하는 성적을 보였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박찬호의 전성기 시절 수상기록을 살펴보아도, 2001년 올스타를 제외하곤 딱히 주요부문 평균자책점, 탈삼진, WHIP, 승수, 이닝수 등에서 1위를 마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다만 박찬호의 경쟁 투수들의 이름들을 보면 박찬호가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다시 느낄수 있다.
[6] 물론 압도적인 차이가 있긴 하다(...).
[7] 이 당시는 연고 지역 내의 고졸 선수들은 별도의 지명 절차 없이 입단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교섭 기간이 11월 1일부터 15일까지로 제한되어 있었고 1990년대 중반에 들어 프로야구와 아마추어 야구의 대립이 심해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8] 면제를 하는 것은 아니었고 미필자임에도 불구하고 해외로 바로 보내줬던 점.
[9] 희생번트 후 뒤에서 껴안은채 놓지 않자 박찬호가 "아 님 왜 안놓으셈? 좀 놔줘요ㅠ" 하니까 벨쳐가 "꺼지셈^^"이라고 말했다.
[10] 박찬호는 사실 시즌 극초반 콜업할 예정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날 비가 오기로 예보되어 있던 날이라서 다저스의 조 토레 감독은 임시 선발 투수를 투입했다. 하지만 의외로 날씨가 맑자 3회에 예정된 선발 투수로 바꾸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시 비가 내려서 투수의 어깨가 식는 바람에 또 선발급 투수를 한명 더 투입하였다. 그 바람에 다저스는 급하게 롱 릴리프가 부족해 박찬호를 콜업하게 되었다.
[11] 물론 선택이야 개인의 몫이지만 여론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으니
[12] 방어율 4점대면 꾸역꾸역이라고 할지도 모르나 2011년 퍼시픽리그는 극도의 투고타저를 겪고 있는 중이다. 박찬호의 경우 2군 내려가기전 방어율은 퍼시픽리그 모든 선발중 뒤에서 2등이다...아주 부진하다고 할만하다.
[13] 실제 박찬호는 고등학교 때 담력을 키우기 위해 야밤에 공동묘지에 혼자 가서 방망이질(?)을 하거나(이 일화는 어느 정도 잘 알려져 있다.), 일부러 미팅에 나가는 등의 노력을 했다고 한다. 대학 1학년때는 선배였던 구대성이 박찬호에게 뻔뻔함을 길러주기 위해 지하철 잡상인을 시키기도 했다고.
[14] 내가 원하는 것은 선발투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꿈 속에서만 살 수는 없다. 때로는 현실을 이해하고, 그 현실 속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15] 2000년에 2개의 홈런을 날린 후 9년만에 쳐낸 통산 3호 홈런.
[16] 그 안타가 홈런이다.
[17] 당시 한국에선 먹튀가 된 박찬호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고 선발이 아닌 계투로 활용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가장 잘 던지는 투수는 계륵 취급받던 박찬호였다. 09WBC 불참선언때 괜히 난리친 것이 아니다.
[18] 방콕 아시안게임부터 친히 뛰어주셨다.
[19] 칼 립켄 주니어에게는 사실상 홈런을 헌납한 것이라고 후에 밝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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