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아직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가정용 게임기 가운데 ‘플레이스테이션2’가 있다. 이 게임기의 전성기 때 아주 완성도 높은 명작들이 출현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2002년작인 [귀무자 鬼武者] 2편이다. 일본 전국시대 사무라이의 이야기인데, 주인공 야규 쥬베이의 모델은 야규 무네요시로서, 야규 집안은 그의 손자 대에 와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검술 지도를 맡을 정도로 검술 명가로 이름을 떨친다. 게임 속의 이 대단한 검사(劍士) 야규 쥬베이 역을 맡은 배우가 마츠다 유사쿠다. 마츠다 유사쿠는 1989년 39세의 나이로 요절했지만 오늘날까지도 많은 일본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배우인데, 어쩌면 이 게임은 이 배우의 작품 가운데 그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한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뭔가 날짜 착오가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1989년에 타계한 사람이 2002년의 게임에서 사무라이 역을 연기한단 말인가? 물론 디지털 기술이 그를 재탄생시켰다. 그는 놀랍게도 생전처럼 말하며, 생전의 얼굴 모습으로 비장함과 분노를 연기한다. 그야말로 한 배우가 죽음으로부터 귀환해서 전성기를 이루었다. 마츠다 유사쿠의 ‘배우로서의 본질’이 귀환한 것이다. 그가 자신의 죽음과 상관 없이 여전히 살아 생전처럼 연기함으로서 배우라는 그의 본질을 구현하고 있다면, 그리고 매우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면, 이제 물어야 할 것은 이런 것이다. 도대체 원본과 가짜라는 것의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최근 가장 흥행한 영화 가운데 하나인 [아바타]와 더불어 생각하게 되는 것도 이런 가짜냐 진짜냐의 물음과 관련이 있다. 멋지고 커다란 파란 인형인 아바타는 한낱 원형을 대리하는 대체물에 불과하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아바타는 바로 주인공의 인생 자체가 되며, 원형적인 지구인은 사라져 버린다. 그렇다면 아바타로서 다른 별에서 살아가는 인생은 가짜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좀 다른 관점에서 우리의 외모, 특히 얼굴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리는 흔히 얼굴을 개성의 징표로 여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얼굴 자체가 개인의 고유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보다는 ‘아바타 자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그런 아바타 말이다.
문예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기호의 제국]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얼굴은 ‘인용’이 아니라면 또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의 헤어스타일, 화장하는 방식, 기분에 따라 즐겁거나 불쾌함을 나타내는 표정 등은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모두 다른 얼굴로부터 ‘인용’된 것이다. 글을 쓰는 이가 다른 책의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한 편의 논문을 완성하듯 우리는 남의 표정과 스타일을 복사한다. 이렇게 다른 것을 베껴 쓰는 방식으로 얼굴을 꾸미고 살아가는 형태는 오늘날 성형의 확산과 더불어 더욱 생기를 얻고 있다. 성형을 하는 이는 아바타를 구매하듯 상점에 놓인 얼굴을 구매한다. 또는 멋진 그림 하나를 자기 얼굴 위에 베껴 그린다. 그렇다면 이것은 가짜 인생이라 해야 하는가? 우리는 순수하게 우리에게 속하는 원본적인 것과 다른 것으로부터 인용한 것을 결코 구별해내지 못할 것이다. ‘원형적인 것 또는 근본적인 것’과 ‘복제된 것 또는 첨가된 것’을 칼로 자르듯 나누기란 불가능하다. 원본과 가짜는 서로 이렇게 뒤엉켜있는 것이다.
나의 얼굴과 표정은 진짜 나의 모습일까?
아바타 속에 들어가 웹서핑을 하고, 다른 이의 표정을 인용하고, 성형을 통해 멋진 그림들을 자기 얼굴 위에 그려 넣은 것은 역사상의 한 시기, 즉 우리들의 시대만의 풍속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옛 사람들도 고유하고 순수하게 자기만의 얼굴을 가지고 살기보다는 다른 얼굴을 인용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잘 알려주는 예가 있는데 중국의 ‘검보(瞼譜)’가 그것이다. 중국에서 초상화를 그릴 때 고객이 얼굴을 손쉽게 선택할 수 있도록 직업화가의 화실에 비치되어 있던 일종의 ‘인물 유형 도감’이 바로 검보다. “초상화가 널리 확산되면서 직업 화가들은 여러 사람의 얼굴 스케치를 모아놓은 화첩을 이용하여 고객으로 하여금 손쉽게 원하는 유형의 얼굴을 선택하도록 함으로써 신속하게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다.” (2003년 동아시아 초상화 전시회를 위한 도록 [위대한 얼굴 ― 한중일 초상화 대전]의 설명이다.)
마치 성형외과를 찾아간 손님이 사진에서 샘플을 고르듯 중국인들은 검보에서 얼굴 샘플을 골라 초상화를 그렸다. 얼굴을 복사해 넣는 지면이 전자는 뼈와 살이고, 후자는 종이라는 점에서 달랐을 뿐, 사람들은 늘 그림으로 그려진 아바타에 탑승하고 살았던 것이다.
이러한 가짜 인생 또는 진짜 원본과 가짜 복사본이 뒤섞여 구별할 수 없는 지대에 놓인 우리의 삶은, 기원에 대한 향수로 표현된 인간의 오래된 희구와 대립한다. 기원적인 것을 추구해온 인류의 성향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예 가운데서도 역사학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전하는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이집트의 프삼메티코스 왕은 인간이 최초에 사용한 기원적 언어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갓 태어난 아이 둘을 오두막에 가두고서 누구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어떤 말도 가르치지 않으면서 길렀다. 2년 쯤 지난 어느 날, 아이들은 ‘베코스’라고 말했는데, 이는 프리기아어로 빵이란 뜻이었다. 그래서 왕은 최초의 인류는 프리기아인이며, 변질되지 않은 순수한 기원적 언어는 프리기아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철학자로서는 바로 플라톤이 모든 존재자들의 순수한 기원이며 원형인 것을 탐구했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이데아’이다. 플라톤은 [소피스테스]라는 책에서, 이데아라는 원형을 ‘모범적으로 닮은’ 것을 ‘모사물(eikōn)’이라 부르고 ‘그저 닮아 보일 뿐’인 것을 ‘유사 영상(phantasma)’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유사 영상은 거짓된 허상이며 “거짓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플라톤의 철학은 바로 모범적인 모사물들을 이 유사영상으로부터 가려내는 분리의 기술(diakritikē)이며, 순수화(katharmos)의 기술이다. 이 분리의 기술을 플라톤은 이렇게 정의한다. “더 나은 것은 내버려 두지만, 더 못한 것은 버리는 것.” 즉 자갈에서 금을 골라내듯 가짜들 사이에서 모범적인 것을 골라내는 것이 분리의 기술이다.
이렇게 인류는 기원·원형·모범·순수한 것에 대한 자신의 취향을 신화적인 이야기와 철학 모두를 통해서 만족시켜 왔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 우리의 삶이 진짜와 가짜, 본래의 인간과 아바타, 원형적 얼굴과 성형미인 사이의 구별할 수 없는 지대에 놓여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아마도 기원적인 것에 대한 열망 없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몇 가지 일상적인 예를 통해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리라. 문화적인 맥락에서 본다면, 기원적인 것, 원형적인 것, 모범적인 것이 실은 가짜와 뒤섞여 구분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어떤 긍정성을 읽어낼 수 있을까? 아마 이런 것이리라. ‘순수한 피를 가진 인종이 있으며, 혼혈이나 유색 인종은 그에 비에 열등한 것이다’라는 위계화의 파괴, 원래 남자가 먼저 만들어졌고, 여자는 그 일부에서 나왔다는 신화적 차별의 파괴 등등.
우리의 삶 속에는 원본과 복제.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서 존재한다.
그러니 오, 나의 가짜 인생이여! 복제와 인용으로 가득 찬 삶이여! 나는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구나. 그런데 ‘나의 가짜 인생’은 좀 어폐가 있는 표현 아닌지? 가짜와 진짜를 구별할 수 없는데,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나’라고 불리는 순수한 것이 있겠는가? 삶은 이렇게 오리지널리티를 지니는 ‘자아’가 사라진 익명성의 터널로 들어간다. 멋진 말을 만들어 잘도 유행에 태워 날리는 현대 철학자들에게 잠깐 발언권을 주면, 그들은 이 사태를 ‘주체의 죽음’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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