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대 철학과 교수 이 강 서
인문학의 위기인가
한때 ‘인문학의 위기’니 ‘철학의 위기’라는 말이 두루 쓰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공계 위기’라는 말도 등장했다. 아니 이것도 위기 저것도 위기라면, 도대체 위기 아닌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위기’라는 단어가 본디 지니는 절박성을 누그러뜨려서 받아들인다. 그 까닭은 지금이 위기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인간, 세계 그리고 삶은 항상 위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현대’를 산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의 현대를 살았고, 칸트에게는 그의 시대가 현대였다. 오로지 한 시대를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시대를 각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살아 있으면서 자기의 시대를 태평성대로 규정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태평성대란 자신이 몸담고 있지 않은 지나간 시대를 회고적으로 바라볼 때에만 쓸 수 있는 말이다. 현재를 사는 인간이 과거의 어느 시대를 가리켜 태평성대로 부른다고 할지라도 그 시대는 정작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에게는 격동의 시대였을 것이다. 자기의 시대는 한결같이 위기인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니 ‘철학의 위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인문학과 철학은 예외 없이 위기이다. 플라톤,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칸트, 니체, 후설, 하이데거, 탈근대 혹은 후기근대론자 등이 위기를 말하는가 하면 우리는 우리 시대를 위기로 규정한다. 이렇게 볼 때 어느 시대를 놓고 위기냐 아니냐를 가리는 일이란 의미 있는 일이 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그 위기의 양상이 무엇이냐 하는 점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인문학 혹은 철학이 위기를 겪고 있다고 말할 때 그 위기의 양상은 어떤 모습일까? 도대체 어떤 점에서 인문학과 철학이 위기라는 것일까? 사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실로 여러 가지일 것이다. 논의를 진행시키기 위해 한 가지만 든다면 인문학이나 철학이 삶의 현장에서 점차 멀어지다보니 현실 연관성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마르크스는 ‘세상을 해석하는 철학’과 ‘세상을 바꾸는 철학’을 구별한다. 그는 지금까지의 철학은 세상을 이리저리 해석해 왔지만 앞으로의 철학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고 한다. 여기에서의 ‘철학’을 ‘인문학’으로 바꾸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꼭 마르크스가 아니더라도 사실 오랫동안 인문학 혹은 철학은 ‘삶의 기술’(ars vivendi, Lebenskunst)로도 받아들여져 왔는데 오늘날 이런 성격을 대폭 상실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인문학과 철학이 현실 연관성을 회복해야만 잃어버린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안락의자의 인문학자?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모은 책(E. Hamilton and H. Cairns, Plato: The Collected Dialogues, Princeton, 1961)의 서문에서 플라톤은 결코 바닥에서 천장까지 쌓인 책에 파묻혀 이론을 자아내는 ‘안락의자의 철학자’(armchair philosopher)가 아니라고 표현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널리 알려져 있는 ‘동굴의 비유’를 보아도 그렇다. 일생을 통해 손발과 목을 결박당해서 고개를 돌릴 수도 없이 벽만만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는 죄수들이 동굴 입구를 등지고 앉아 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 결박에서 풀려나서는 몸을 돌리고 동굴 밖으로 나온다고 생각해 보자. 동굴 바깥에서 태양 아래 빛나는 사물의 원래 모습을 보기까지 죄수는 가파른 동굴을 고통스럽게 기어올라가야 한다. 플라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 죄수가 다시금 동굴 안으로 기어 들어가 동료 죄수들에게 그들이 보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번도 결박에서 풀려나 본 적이 없는 그들이 이 말을 믿겠는가? 또 이 죄수가 동료들을 억지로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려 한다면 그들은 이 성가신 자를 없애려들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이 위험 천만한 일을 하다가 죽어간 사람이 소크라테스이다. 플라톤 철학은 이처럼 동굴 안에서 밖으로의 이데아 인식의 오름길과 다시 밖에서 안으로의 실천의 내림길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근현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면서 이와 같은 실천의 내림길이 철학과 인문학에서 대폭 약화된 것이다. 진리 인식의 오름길만 강조되고 실천의 내림길은 정당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철학 더 나아가 인문학의 정체성에 비추어 여간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일이 이 점과 관련해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여겨져서 좀 자세히 소개하려고 한다.
얼 쇼리스의 희망 수업
2006년 5월 4일 서울의 성공회대학교에서 이색적인 졸업식이 열렸다. 40대에서 60대에 걸쳐 있는 13명이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을 마치고 학사모를 썼는데, 이들은 불과 1년 전만 해도 서울역 근처를 전전하던 노숙자들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노숙자들이 졸업한 것은 자활을 위한 기술 교육 과정이 아니라 인문학 과정이었다. 성공회 산하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와 삼성코닝이 공동으로 기획한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 제1기는 2005년 9월에 시작되었다. 40여명의 노숙자들이 입학신청서를 내고 면접과 심리검사를 받았으며 이 가운데 20명이 선발되었다. 이렇게 입학한 노숙자들은 철학, 문학, 역사, 예술사 그리고 글쓰기의 총 5과목에 걸쳐 주 3회 수업을 했는데, 13명이 졸업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학생들은 쪽방이나 월세방을 마련해 자활에 나서는 등 노숙 생활을 청산했다고 한다. 이들은 무료 급식을 꺼리게 되고 어떻게 해서든 음식을 스스로 만들어 먹거나 사먹으려 한다고 한다. 사람을 바꾼 힘의 원천은 인문학이었다. 사람과 세상을 바꾸는 철학 혹은 인문학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웅변하는 사례라고 하겠다.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의 뿌리는 얼 쇼리스(Earl Shorris)의 ‘클레멘트 인문학 과정’이다. 미국 시카고대학을 졸업한 얼 쇼리스는 언론인, 사회 비평가, 대학 강사, 작가 등 일인 다역의 활동을 해 왔는데, 무엇보다도 빈민 교육 활동가이기도 하다. 그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희망 수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빈곤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취재 중이던 얼 쇼리스는 1995년 뉴욕 교도소 죄수들을 대상으로 열린 ‘가족폭력예방 워크숍’에 참여했다. 여기에서 그는 살인죄로 8년째 복역 중인 할렘가 출신 여자 죄수와 마주 앉았다. 그가 사람들은 왜 가난한지 물었을 때 20대 초반의 여죄수는 정신적 삶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정신적 삶이 무엇이냐고 다시 캐묻자 이번에는 “극장, 연주회, 박물관, 강연 같은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렇게 말하는 여죄수의 눈빛은 얼 쇼리스가 1995년 최하층 빈민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클레멘트 인문학 과정’을 창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뉴욕에서 첫 과정을 시작했을 때 그의 시도는 주변으로부터 이해 받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하층 빈민들에게 빵과 잠자리를 제공한다는 것은 상식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오히려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그 당시에는 비상식이었다. 그는 마약 중독자, 노숙자, 전과자, 매춘부, 실업자 등 31명을 뉴욕 복지 시설 ‘로베르토 클레멘트 가족보호센터’에 모아 1주일에 이틀, 매번 2시간씩 철학, 문학, 역사, 예술, 논리학을 가르쳤다. 이때의 수업 장소를 따서 ‘클레멘트 코스’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간신히 글자를 읽을 정도인 학생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를 함께 읽었다고 한다. 5개 과목의 강사진은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었고, 수업은 강의식이 아니라 철저한 소크라테스식 대화와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강사와 학생은 동등한 입장에서 토론하며, 강사는 안내자 역할에 머문다고 한다. 첫 1년 코스가 끝났을 때 31명 가운데 17명이 수료증을 받았고 그 중 14명은 뉴욕 바드대의 심사를 거쳐 학점을 취득했다. 이들 중 2명은 나중에 치과 의사가 되었고, 1명은 간호사가 되었다. 한 여성 전과자는 약물중독자 재활센터의 상담실장이 되었고, 영문학 박사과정을 밟는 졸업생도 있다. 물론 중도에 탈락하는 학생들도 있었다고 한다. 탈락의 이유는 주로 에이즈를 비롯한 질병이었다. 얼 쇼리스가 이 일을 시작하도록 만든 바로 그 여죄수 비니스 워커도 감옥에서 석사 과정까지 마쳤지만 결국 에이즈로 세상을 떠났다.
‘클레멘트 인문학 과정’이 제공하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삶에 대한 성찰’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온갖 열악한 조건과 환경에 둘러싸여 있고, 그렇기 때문에 매사 즉각적으로 대응하기 십상이다. 인문학 과정은 이 사람들로 하여금 반성적 사고를 하도록 만들고, 이 반성적 사고는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싶다는 소망을 품게 만들었다. 새로운 ‘삶의 방식’(modus vivendi)에 대한 소망은 오랫동안 이들이 잊고 있었던 스스로에 대한 사랑과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일깨웠다. 이러한 일련의 선순환이 결국 사람을 바꾸고 나아가 세상을 바꾸기에 이른 것이다. 이미 고전이 된 영화 「벤허」에서 우리 주인공 벤허가 다른 노예들과 함께 전함의 노를 젓는 장면이 있다. 북소리에 맞추어 수많은 노예들이 일사불란하게 노를 젓는데 감독관들은 가차없는 채찍질로 독려한다. 여느 노예들은 채찍질을 당하면 비명을 지르면서 더욱 빠르게 노를 젓는다.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독관이 벤허를 매질했을 때 벤허는 그 감독관을 쏘아본다. 벤허의 이 눈빛을 기억하는가? 그때 감독관이 말한다. “너는 노예가 아니구나.” 벤허의 눈빛은 자유인의 눈빛이었다. 이 자유인의 눈빛은 깊이깊이 자신을 사랑하고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잃지 않는 데서 나온다.
인문학의 특별한 쓸모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우리 시대 우리 사회가 오해하듯 쓸모 없는 학문이 아니다. 인문학의 쓸모와 여타 학문의 쓸모가 다를 뿐이다. 아니 오로지 인문학만이 사람과 세상을 진정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런데도 인문학이 무엇에 기여하느냐는 비아냥은 표피적이고 계량적인 쓸모만을 알고 있다는 스스로의 천박성을 고백하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priceless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의 놀라움이 아직도 남아 있다. 보통 접미사 less는 ‘없다’, ‘결여’를 뜻한다. 그러니 priceless라면 값이 없다는 것이니 ‘별 가치가 없다’, ‘쓸모 없다’ 정도를 뜻할 줄 알았다. 어럽쇼. 그게 아니었다. priceless는 ‘너무 소중해서 값을 매길 수 없다’는 뜻이다. 잘 알아둘 일이다. 정작 중요한 것에는 가격이 없는 법이다. 철학을 위시한 인문학이 바로 그렇다. 만일 인문학은 쓸모가 없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이때의 쓸모는 여타의 학문이 내놓을 수 있는 쓸모를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인문학에는 그런 쓸모는 없지만 그 대신 다른 쓸모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얼 쇼리스는 인문학이 아니 오로지 인문학만이 자유로워지기, 일상을 새롭게 생각하기, 과거에 짓눌리지 않기,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등을 시작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다고 말한다. 인문학을 통해 성찰적으로 사고하고 자율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의 비참하고 절망적인 처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클레멘트 인문학 과정’은 현재 북미, 호주, 아시아에서 53개 코스가 운영된다고 한다. 지난 11년간 전 세계에서 가난한 사람 4000명이 졸업했고 최근에는 한 해 신입생이 12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얼 쇼리스는 더 많은 지역에 ‘클레멘트 인문학 과정’을 개설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클레멘트 코스를 다양화해서 나중에 일반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수강생들을 위한 특별 과정과 여성 노숙자들을 위한 과정을 따로 마련할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도 금년 5월말까지 제2기 학생을 선발한다고 한다. 노숙자에게 재활과 사회 복귀를 위한 생업이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을 가르친다는 발상은 도대체 인문학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의미 있는 도전이라고 하겠다. 얼 쇼리스는 올해 초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클레멘트 인문학 과정’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워크숍을 주관하고 돌아갔다. 또 2004년 8월 11일에는 KBS가 「가난한 자의 철학자 얼 쇼리스의 희망수업」이라는 보도 기획물을 방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이 의미 있는 일들은 여전히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이런 데에서도 적용되나 보다. 온갖 나쁜 것들은 그렇게도 빨리 퍼지더니만 두루 알려지면 좋을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만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