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모습은 '미적(美的)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감각적 쾌락을 쫓아 산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평생 하루 종일 전자 오락만 하면서 놀고 지낸다고 생각해 보자. 이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 방학 때 사나흘 동안 내리 전자 오락을 해본 경험이 있는 학생이라면 오락마저도 얼마나 큰 고통이 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때 인간은 바라보고 즐기기만 할 뿐 행위하지 않고 책임도지지 않는다. 이렇게 감각적 쾌락만을 좇는 삶의 결과는 '권태'와 '절망' 뿐이다. 그런 쾌락으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두 번째 단계인 '윤리적 단계'에 따른 삶을 살게 된다. 쾌락만을 좇아 무비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보편적 가치와 윤리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다. 이 때 인간은 비로소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결단을 내리며 스스로 책임 지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불행히도 인간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도덕 군자처럼 살아간다 할지라도 인간은 언젠가는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윤리적 인간이 되어 보려는 노력도 허무하게 느껴지고, 인간 존재마저 허무하게 느껴질 뿐이다. 인간은 이 '불안'과 '절망'을 통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인간으로서 완전하고 참된 삶은 세 번째 단계인 '종교적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실현된다. 스스로의 결심에 따라 진정으로 신을 믿고 따를 때에 인간으로서의 무력감과 허무함을 떨쳐 버리고 완성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의 삶으로 옮겨가는 것은 '자기 자신의 주체적 결단과 도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마치 부모님과 선생님이 아무리 공부하라고 다그쳐도 정작 자신이 공부하려고 하지 않으면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로 말이다. 키에르케고르가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대부분 성적 나쁜 이유를 끊임없이 자신 외에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듯이, 사람들은 자신이 윤리적이고 주체적이지 못한 이유를 계속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찾으며 변명하려 한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에게 '신 앞에 선 단독자'로 살아갈 것을 요구했다. 신이 나의 모든 행동과 말을 보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나 외에 다른 것에 책임을 돌릴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기분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결단하고 노력하며 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