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굴레다. 내 아버지가 가난했고, 내 할아버지가 가난하게 살았듯이,
내가 이대로 가난하게 산다면, 그것은 내 아이도 손자도 쭉~ 가난할 거라는 의미이다.
그 증거로 하나만 제시하고자 한다.
입시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치곤 했고 또 한다. 강남에서도 잠깐 있었다.
흔히들 오해하는 것처럼 부유층 자녀들이 건방질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어느 계층 어느 부류에서도 빗나간 아이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적어도 내가 접한 아이들 가운데,
부유층의 아이들일수록 더욱 예의 반듯하고 깍듯했다.
설사 고액을 지불하는(주 3일, 두 달에 500만원을 지불하는 녀석도)
가르치는 자에 대한 경외심을 확실하게 챙겼다.
그들을 보며 또 그들의 부모들과 상담하며 알게 된 것.
강남의 부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상당수가 꽤 많은 교육을 받은 엘리트라는 점 무시 못한다.
땅을 들고 있다가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부자가 되어버린 사람 역시 없지 않겠지만,
그런 사람 찾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 그들은 아마 진작에 강남 바닥에서 밀려났지 싶다.
강남의 엘리트들은 대개가 소위 명문대를 졸업하고, 또 유학이 흔하지 않던 시절에 유학을 다녀왔고, 사짜의 전문직이거나 장짜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높은 교육을 받은 것에 대한, 학벌에 대한 메리트를 충분히 누리는 사람들이고
또 그래서 학벌에 대해 집착한다.
그들에게는 옛날, 돈을 벌기 위해 돈을 추구해야만 했던 시절의 찌들린 흔적이 없다.
그들은 사회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충분히 활용했고(때로 편법도 있었겠지만)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특별히 자녀들의 교육에 아주 관심이 높다. 관심이 높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공부를 했던 사람들인지라 어떻게 공부를 해야하는지 나름대로의 노하우도 튼튼하다.
(지방에 내려와서 그게 더 여실히 구분된다. 공부해라는 말을 많이 한다고 교육열이 높은 것인가?)
그들은 자신들이 걸었던 길, 가 보았던 길로 자녀들을 이끄는 것이다.
그들의 자녀들은 가진 자의 당당함과 함께 배우려는 겸손한 자세를 터득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부모를 보며 직접 배웠으리라 짐작한다.
그래서 추측해볼 수 있다.
이전의 세대(그래야 이 땅에 자본주의가 얼마나 되었나)에서는
자녀에게까지 부를 영속시킬 수 없었겠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제는 자녀들에게 부를 영속시키겠구나. 그들의 자녀들까지도 부유하게 살겠구나.
그들은 이미 부모들이 이룩한 언덕 위에서, 부모들을 보며 스스로 체득한 부의 원리를 발현시키며
더욱 빠른 걸음으로 더욱 큰 부자가 되어가겠구나.
그렇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들에게 부는 영속한다. 지금 자신이 부자이듯이 자녀들도 부자로 살 것이고, 그들의 손자도 그 후대도 역시 부자로 살 것이다. 돈을 물려준 게 아니라, 엘리트의 자질을 물려준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사실 그들을 대하면서 섬뜩하게 여겼던 것은 바로 내 아이들이다. 내 아이들은?
스타트랙을 보면 라퓨타라는 행성이 있다.
처음 그 이야기는 죠나단 스위프트가 지은 걸리버의 여행기에 등장한다.
라퓨타. 천공의 섬. 하늘 위에 떠 있는 섬을 말한다. 그 라퓨타는 지상과 떨어져 있다.
지상에는 노동을 하는 평민들이 있고 그들이 바치는 조공으로
라퓨타는 하늘 위를 떠다니면서 문화생활을 향유하고 있다.
음악과 예술과 사교를 즐기면서 넉넉한 귀족 생활을 하는 동안에 땅 위에서는
그들의 사치를 감당할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뼈가 빠지게 일해야 한다.
타워팰리스를 보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그 라퓨타를 이 땅위에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기술력과 법적 제약만 없었으면, 그들은 그들의 부로 천공의 섬을 만들고도 남았을 사람들이다.
서울 하늘 위에 붕 떠 있는 또 하나의 도시를 만들고도 남았을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럴 의지도 있고 능력도 있다. 다만, 현대의 기술이 따라가지 못한 것이지.
어쩌면 난 부유층의 아이들을 보면서 심한 절망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아주 되바라지고 건방지고 모가 심한 인격의 장애아이기를 기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음 대에서는 변화가 있을 테지, 하고 기대한 것인지도
하지만 그들은 (비교란 불가능한 거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오히려 더 사랑스럽고,
더 자랑스럽고, 더 어여쁜 짓을 하는 아이들인 것을 어떡하나.
그들 속에는 이미 어릴 적부터 성공자의 코드를 이식한 채 아주 편하게 다루고 있었다.
내가 억지로 성공자의 코드에 나 자신이 접붙임을 하려고 애를 쓰는 반면
그들은 손쉽게 다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사랑스러운 만큼 난 더 절망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더욱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남은 자는? 내 아이는? (세상에 아직 결혼도 못한 총각이 참 멀리도 걱정한다.)
가난이 굴레이듯, 이제 성공도 부도 영속하는 세상이 되어버리면 어떡하나.
영원히 깨트릴 수 없는 계급이 되어버리면 어떡하나.
스스로 자유인이라 생각하지만, 그 모든 게 착각이면 어떡하나.
나 자신의 무엇을 자유롭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유인이라고?
이 나라가 싫다 한들 어디로 갈 수 있나? 이 직장이 싫은데 그만 둬버릴 수 있나?
밤에 잠이 오지 않아도 억지로 잠을 청해야 하는 처지에 자유인이라고?
어쩌면 당신이나 나나,
자신의 혈통의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유일하게 기회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증거 하나를 보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