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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처 = SBS>

  법원이 혼전순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남편에게 이혼 책임을 물었다.

  지난 14일 서울가정법원 가사4단독 서형주 판사는 부인 A(32)씨가 남편 B(35)씨를 상대로 낸 이혼 및 위자료 청구소송에서 "혼인 파탄의 근본 원인 및 주된 책임은 혼전 순결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가부장적인 사고 방식으로 A씨에게 치욕적인 말을 한 B씨에게 있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에 따르면, 신혼여행 첫날밤에 남편은 "나는 경험도 없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해 결국 잠자리는 부인에 의해서 주도됐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에 남편은 "업소 여자 같다"며 경멸적인 말을 했고 이에 부인은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에도 남편의 모멸적인 언행은 계속됐다. 부부 동반 회식에 참석한 부인은 남편 동료들의 음담패설에 당황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남편이 부인에게 "너는 회사 동료 앞에서 나를 망신시켰고, 내 회사 동료 한 명이 네게 윙크를 했다"며 크게 화를 냈다.

  악화된 부부 관계를 회복하고자 부인은 남편에게 화해를 청했다. 하지만 남편은 "여자가 조신한 모습을 보여 주길 기대했는데 네 행동은 내 가치관에 부담스럽다"면서 거절해 결국 이들의 결혼 생활은 혼인한 지 보름 만에 파경을 맞았다.

  재판부는 "아내에게 직업여성 같다는 말을 해서 정신적 고통을 안기고 부부간의 사적인 일을 시어머니에게 물어보는 등 어른답지 못한 행동을 했다"면서 "B씨는 위자료 2000만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남편은 부인이 "친구들과 외박을 해도 되겠느냐"고 물어보자 "어머니한테 물어보니 절대 안 된다더라"며 마마보이 같이 처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소식을 접한 네티즌은 "남자 망신 다 시키는구나", "이 남자 부부관계까지 엄마한테 얘기했을 듯", "애초에 여자를 사랑하지 않은 것 같다", "차라리 여자에겐 잘 된 일이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디시뉴스(www.dcnews.in),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기 기자 dc.kikim@gmail.com

ㅇㅇ 디시 아다들의 미래네ㅋㅋㅋㅋ 11-09-14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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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 업소여자 같닼ㅋㅋㅋㅋㅋ 지는 업소에서 좀 뒹굴었나보네 그걸 어케 안데?? 11-09-14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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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ㅇ 그래서 처녀였다는거야 중고품이었다는거야? 11-09-14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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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 ㅎㄷ녀한테 민주화 11-09-14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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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wq ㄴㅇ//여자 나이 32에 새삥이면 그거 나름대로 문제다. 11-09-14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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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wq 먼가 한마디 싸지르기도 난감한 수준의 캐볍진이네... 저런새퀴가 어떻게 결혼은 했는가 몰라... 11-09-14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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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d 놀고있네 후다의 변명일뿐이지 11-09-14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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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ㅇ 들뜬마음에 차를 샀는데 중고품이면 기분이 어떻겠어 저건 반품도 안되는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1-09-14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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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 조나 같은 남자인게 수치스럽다 11-09-14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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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면갤 면갤러 김정액의 미래 ㅉㅉ 11-09-14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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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rar 사랑과전쟁이네 근데 부부동반모임이런데서 음담패설하면서 놀고그러나 ㅋㅋㅋㅋㅋ 답없네 11-09-14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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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dntlsz 이럴거면 결혼을 하지말던가 11-09-14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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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ㄴㅇ 부부 동반 회식에 참석한 부인은 남편 동료들의 음담패설에 당황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남편이 부인에게 "너는 회사 동료 앞에서 나를 망신시켰고, 내 회사 동료 한 명이 네게 윙크를 했다"며 크게 화를 냈다. 11-09-14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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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ㄴㅇ 음담패설에 당황하지 않는게 왜 망신이냐 11-09-14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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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wq rarar//디씨수준은 아닐테고 야한 농담 정도였겠지 11-09-14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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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ㄱ 여자 : 오빠 차 있어? 남자 : 넌 처녀막 있어? 11-09-14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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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한국 지자들의 현실이지 상품처럼 여자 나누는 거 ^^ 11-09-1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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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ㅁㄴ 근데 여자가 새거라고 거짓말한거면 여자한테도 책임있지않냐? 11-09-1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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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 "어머니한테 물어보니 절대 안 된다더라" 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왜케 웃기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1-09-1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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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ㄴㅇㄹ 결혼 전 만났던 여자들과 할 거 다 해놓고 결혼은 새삥하고 결혼하겠다는 건 이기적인 거 아님? 남자도 새삥이면 몰라 11-09-14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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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결정론.(고승덕 칼럼 펌)
  한국에서 '성공'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쉬운길은 '공부'라 할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공부는 누구나 할 수 있는것이고, 그 접근성이 용이하므로 신분 내지는 부의 여부에 구애받지아니하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 한국은 의무교육을 시행하고있으며 현재 고등학교 수준의 의무교육 내지는 무상교육도 논의중인것으로 알고있다.
  여기서 '누구나 할 수 있다'와 '접근성이 용이하다'라는점이 중요한데, 공부이외의 성공루트 예컨데 예­체능의 경우, 선천적 유전자의 여부와 그 작용이 상당하고 또 대다수의 사람들 스스로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공부는 일반적으로 그러한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고, '꾸준한 노력'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과연 이러한 생각은 옳은 것일까? 
  흔히 작심삼일이란 말을 종종 사용한다. 작심한것이 삼일을 체 못가는 혹은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우리 주위에 빈번히 있는데, 그 이유를 유전자와 결부하여 생각해보고자 한다. 학창시절... 누구나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 '게으르게 살지 않겠다' '게임을 적게하겠다' 따위의 작심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곧 그 작심이 무뎌지고 끝내 몇일을 가지 못하고 없던일로 되곤한다. 불과 소수의 학생들만이 그 작심을 끝까지 지키고 성취해 내는 것이다. 왜 이런차이가 나오는 것일까, 이 두 그룹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것일까?
  유전자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유전자는 생각 이상으로 많은 부분에 개입한다. 쉽게 생각할수 있듯이 얼굴생김새, 키, 체형 등의 신체적인 부분은 물론이거니와 당뇨, 탈모 등의 질환. 심지어 목소리나 성격, 습성, 습관, 가치관까지 모두 유전자의 영향을 상당히 받는다. 아니,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쉽게 주위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예컨대 부모의 키가 크면 대체로 그 자식의 키가 크고, 부모의 탈모, 당뇨 등 질환은 유전성이 강하며, 자식은 그 부모의 성격 내지는 습성을 닮는 경우가 빈번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성격, 습성, 습관, 가치관까지 모두 유전자의 영향을 상당히 받는다는 사실이다. 가장 보편적이고 쉬운 성공루트! 공부. 하지만 대다수의 일반인은 공부로 성공하지못하고 좌절하게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의 성격이나 습성마저도 유전자에 의해 조작된다는것.' 

  결국 공부로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노력 부족'이 아니라, 성격이나 습성자체가 공부와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고도의 집중력으로 공부에만 몰두하고, 나태해지지않고 꾸준히 노력하며 공부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가 '유전자의 권한'이라는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지식의 습득 및 운용능력에 대한 선천성-유전자의 우열-'까지 논한다면, 그야말로 선천적 유전자의 여부와 작용 및 그로인한 영향력은 막대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이러한 사실을 쉬쉬하는 분위기다. 한국에서 성공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쉬운 '공부루트' 마저도 예-체능과 마찬자기로 유전자의 작용에 그 성패가 좌우된다면 얼마나 좌절스럽단 말인가. 
  어쩌면 이러한 유전자의 폭넓은 작용을 이미, 우리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것일지도 모른다. 여자가 결혼시 남자의 능력을 따지는 행위, 남자가 여자의 외모를 따지는 행위가 유전자 결정론의 간접적인 표식이라 할것이다.

 

1. 최상위 그룹(차관급이상)  

 

국회의원(거의 우리나라짱이라고 보면 된다. 장관한테도 안꿀린다.) 
 
장관,차관 행정부 공무원

감사원장,국정원장(장관급이상이다)

법원장급 판사,  검사장급 검사(판검사들 중에서 여기서부터가 차관급이다.)

경찰청장,해양경찰청장(차관급)

국세청장,관세청장(차관급)
 
군단장(쓰리스타) - (차관급)

서울시장,경기도지사 - (장관급)

광역시장,도지사 - (차관급)

대학교총장,도교육감 (장차관급)

초대형병원 원장.(서울,아산,삼성,세브란스)

 

 


2. 상위그룹(공무원 3급이상)

 

중앙부처 3급이상 공무원

판사,검사

경무관, 지방경찰청 차장

서울시 부시장. 부도지사

기초지자체 시장

대령

대학교수 학장급

중대형병원 원장

 

 

 

3.  준 상위그룹 (공무원 4~5급)

 

중앙부처 4~5급 공무원

사법시험, 행정고시 합격자

경찰서장(4급) , 일선 경찰서 과장(5급)

중령,소령

대학교 정교수

중고등학교 교장

전문의 의사

 

 


4. 중위 그룹(공무원 7급)


중앙부처 7급 공무원

경찰 경위(7급)

군대 소위(7급)

학교 교사(7급)

약사

 

 


5. 중하위 그룹(공무원 9급)

중앙부처 9급 공무원

경찰(순경)

군인(하사)

 

 

6. 하위 그룹

비정규직 노동자, 아르바이트생

 

 

7. 최하위 그룹

백수.

디씨 폐인

<문제 예시>

책문 [시험문제] 
왕[세종대왕]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고금의 일반적인 근심거리다. 
후한(後漢)에서는 무사 선발시험 날에 군사를 일으킨 폐단으로 인하여 지방의 도위(都尉)를 줄이고 전차와 기병을 관장하는 벼슬을 혁파하였으며, 송 태조는 당나라 말기에 번진[절도사]이 강했던 것을 보고 병사 하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이 직접 관리하였다.
그러나 후한은 병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외방이 약한 실수가 있었고, 송나라는 적국과 전혀 다투지 못할 정도로 전력이 허약한 걱정이 있었다. 
한 문제(BC 180 - 157)는 '가의'의 말을 받아들여 대신을 예우(禮遇)하고 형벌을 가하지 않게 하였는데, 그 말류(末流)의 폐단으로 대신이 모함을 당해도 스스로 하소연할 수 없었다. 
당 태종(626 - 649)은 신하를 염치[예의]로 대하여 삼품 이상은 다른 죄수들과 같이 불러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하니 다른 죄수들은 불려와 정황을 이야기할 수 있었는 데, 도리어 귀한 신하는 불려오지 않아 잃는 것이 많았다. 
광무제(25 - 57)는 전한에서 여러 세대 동안 정권을 잃은 것을 거울 삼아, 삼공에게 아무 실권 없이 자리나 지키게 하고 정권을 대각[상서성, 그 당시의 비서실]에 돌아가게 하였다. 
예로부터 인재를 살피고 헤아려 등용하거나 내치는 것은 어려웠다. 한, 당 이후 어느 때는 재상이 주관하거나 또는 전조[이조와 병조]가 주관하였으나, 그 득실에 대해서는 후대 사람의 의논이 분분하였다. 
위에 말한 네 가지는 모두 다스림의 도(道)와 관련이 있는데, 그 자세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조선에서는 고려의 사병(私兵)을 경계하여 모두 혁파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한 대신이 다시 사병의 이로움을 말했다. 
고려에서 대신을 욕보인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비록 죄과(罪過)가 있다 해도 죄를 직접 캐묻지 않고 여러 가지 증거로 죄를 정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죄 없이 모함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대신이 정권을 쥐고 흔든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임금에게 재결받도록 하여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또 말하기를 '승정원이 가진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정방이 외람되게 인사권을 행사한 폐단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이조와 병조가 분담하게 하였는데, 그 권한이 또한 크니 정방을 다시 설치하고 제조(提調; 큰 일이 있을 때 임시로 임명되어 그 관아를 다스리는 경우의 종 1 품, 또는 2 품인 경우. 정 1 품이면 도제조.)를 임시로 낙점하도록 하자는 대신이 있다. 
거론된 대신들의 네 가지 책(策)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또 다른 의견이 있는가? 
그대 대부들은 사책(史策)에 널리 통달하니 현실에 맞는 대책을 깊이 밝혀, 각자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 
 
성삼문과 신숙주의 과거시험 답안
 
 이 과거 답안이 실려있는 책은 "명문명답으로 읽는 조선 과거 실록"이다.  국민대 교수인 지두환 번역이며 동연출판사에서 1997 년 출판된 책이다.
  이 과거를 보기까지 두 분이 겪은 시험을 간단히 소개한다.
  성삼문은 1418 년 태어나셨고, 신숙주는 한 살 위이다.
  근보 성삼문은 만 17 살인 1435 년에 생원시를 합격하고, 20 세인 1438 년 식년 문과에서 정과로 급제하셨다. 이 때 하위지도 함께 급제하였다.
 신숙주는 조금 늦게 만 21 살인 1438 년 생원, 진사시를 합격하고, 22 살인 1439 년 친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문과에 합격한 두 분은 모두 관직에 등용되어 결국 집현전에서 모여 공부하게 되었다. 신숙주가 남의 숙직까지 도맡아하며 궁궐에 있는 책을 밤 늦게까지 읽다가 그대로 잠든 것을 보고 세종대왕께서 어의를 덮어주라고 지시하신 일도 이 기간에 있었다.
  1446 년 9 월 29 일 훈민정음 반포에는 두 분 모두 공이 컸다. 두 분 모두 음운에 대한 연구를 위해 명나라에 10여 차례 다녀왔다는 이야기가 두 분의 전기에 모두 나온다. 두 분이 매번 같이 가셨는지, 서로 다른 시기에 가신 경우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두 분이 아주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근보의 시에 신숙주가 지은 시의 운을 따서 지은 것이 몇 편 전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친분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1447 년 이 답안을 작성한 문과 중시에서 근보 성삼문[만 29 세]은 장원급제하고, 신숙주[만 30 세]는 4 등에서 10 등까지인 을과에 급제를 하였다. 앞에서 말한 신숙주가 숙직을 도맡아가며 열심히 한 공부의 결과가 이 답안지에 보인다.
  신숙주는 근보 보다 한 살 위이다. 그러나 생원시험, 문과 대과를 합격한 시기는 조금씩 늦다. 단지 이 문과 중시에서는 같이 합격하였으나, 역시 장원은 근보가 차지하였다.
  [김종서와 황보인이 죽은 계유정난은 1453 년이다. 이 후에 1454 년 근보 성삼문은 집현전 부제학을 거쳐, 1455 년 예방승지에 임명된다. 이 1455 년 수양대군이 사신으로 명나라에 갈 때 신숙주가 같이 가게된다. 왕복 기간동안 두 사람이 같은 뜻을 가지게 된다고도 한다. 그러나 신숙주는 1453 년 계유정난의 1 등 공신이었으므로 언제 두 사람이 가까워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456 년 성삼문은 단종의 복위를 위한 의거(義擧)가 고발되어 처형 당한다. 이 시험을 본 9 년 후이다. 나이는 38 세]
 

성삼문의 답안
    1447 년 세종 29 중시(重試)에 장원급제
 
 책문 [시험문제]
 왕[세종대왕]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고금의 일반적인 근심거리다.
[임성삼의 주(註); 지금도 동일하다. 폐단이 없는 법은 없다.]

 후한(後漢)에서는 무사 선발시험 날에 군사를 일으킨 폐단으로 인하여 지방의 도위(都尉)를 줄이고 전차와 기병을 관장하는 벼슬을 혁파하였으며, 송 태조는 당나라 말기에 번진[절도사]이 강했던 것을 보고 병사 하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이 직접 관리하였다.
 그러나 후한은 병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외방이 약한 실수가 있었고, 송나라는 적국과 전혀 다투지 못할 정도로 전력이 허약한 걱정이 있었다.
 
 한 문제(BC 180 - 157)는 '가의'의 말을 받아들여 대신을 예우(禮遇)하고 형벌을 가하지 않게 하였는데, 그 말류(末流)의 폐단으로 대신이 모함을 당해도 스스로 하소연할 수 없었다.
 당 태종(626 - 649)은 신하를 염치[예의]로 대하여 삼품 이상은 다른 죄수들과 같이 불러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하니 다른 죄수들은 불려와 정황을 이야기할 수 있었는 데, 도리어 귀한 신하는 불려오지 않아 잃는 것이 많았다.
 
 광무제(25 - 57)는 전한에서 여러 세대 동안 정권을 잃은 것을 거울 삼아, 삼공에게 아무 실권 없이 자리나 지키게 하고 정권을 대각[상서성, 그 당시의 비서실]에 돌아가게 하였다.
 
 예로부터 인재를 살피고 헤아려 등용하거나 내치는 것은 어려웠다. 한, 당 이후 어느 때는 재상이 주관하거나 또는 전조[이조와 병조]가 주관하였으나, 그 득실에 대해서는 후대 사람의 의논이 분분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여기서의 인재등용은 지금으로 말하면 "인사"문제이다. 인사의 권리를 총리가 가져야 하는지, 혹은 내무부와 국방부에서 가져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위에 말한 네 가지는 모두 다스림의 도(道)와 관련이 있는데, 그 자세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임성삼의 주(註); 앞으로도 여러번 나오나 위의 네 가지를 다시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세종대왕께서 21 세에 왕위에 올라 29 년 동안 재위하셨을 때 위의 문제를 출제하셨다.]
 
 우리 조선에서는 고려의 사병(私兵)을 경계하여 모두 혁파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한 대신이 다시 사병의 이로움을 말했다.
 고려에서 대신을 욕보인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비록 죄과(罪過)가 있다 해도 죄를 직접 캐묻지 않고 여러 가지 증거로 죄를 정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죄 없이 모함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대신이 정권을 쥐고 흔든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임금에게 재결받도록 하여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또 말하기를 '승정원[임주;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이 가진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정방이 외람되게 인사권을 행사한 폐단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이조와 병조가 분담하게 하였는데, 그 권한이 또한 크니 정방을 다시 설치하고 제조(提調; 큰 일이 있을 때 임시로 임명되어 그 관아를 다스리는 경우의 종 1 품, 또는 2 품인 경우. 정 1 품이면 도제조.)를 임시로 낙점하도록 하자는 대신이 있다.

 거론된 대신들의 네 가지 책(策)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또 다른 의견이 있는가?
 
그대 대부들은 사책(史策)에 널리 통달하니 현실에 맞는 대책을 깊이 밝혀, 각자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
[임성삼의 주(註); 문제가 크고 정확하다. 또한 그 당시의 실제 문제와 직접 관련이 있다.
먼저 중국의 역사적인 사실을 들고, 우리의 경우를 말했다.]
 

대책[답]
 신이 들으니, 마음은 정치를 하는 근본이고, 법은 정치를 하는 데 필요한 도구라 합니다.
 
만 가지 변화가 마음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고, 여러 정치가 마음이 아니면 행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윗사람이 된 자가 마음을 보존하고 법을 들어 정치를 한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옛날 현명한 임금은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데 이와 같이 했을 뿐이었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혹시 근보가 미리 준비한 것이 아닐까? 이와 비슷한 문제에는 모두 통용될 좋은 문장이다. 끝까지 살펴보기 바란다.
세종대왕께서는 실제적인 실천 방법에 대해 물으셨으나 근보는 임금의 마음 자세가 옳아야 한다고 처음부터 주장하고 있다.]
 
 삼가 공경히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성군(聖君)으로서 훌륭하신 선대의 임금을 계승하여 온 정성을 다해 다스리길 도모하시니 정치를 하는 근본이 이미 섰고, 정치를 하는 데 필요한 도구도 잘 시행되어 시사(時事)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말한 만한 것이 없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이것이 근본적으로 근보와 신숙주의 다른 점이다. 나중에 신숙주 답안지의 마지막 부분과 비교해보자.]
 
 그런데도 오히려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생기면 구제하기 어려운 것을 염려하시어 과장(科場)에 신들을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병을 설치하는 것, 대신을 예로 대하는 것, 정권을 나누는 것, 정방을 다시 세우는 것 이 네 가지를 질문의 조목으로 삼아 먼저 역대 정치의 득실을 말씀하시고, 다음으로 대신이 건의한 것의 가부를 물으시어 지당하게 하나로 귀결되는 의논을 듣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들이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이니 감히 비천한 회포를 다하여 고결한 물음에 만 분의 일이나마 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임성삼의 주(註); 여기까지가 도입부이다. 참으로 좋다. 일단 유려한 문장으로 질문을 정리하고 있다.]
 
 신이 엎드려 성책(聖冊)을 읽어보니,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고금의 일반적인 근심거리다.
 후한(後漢)에서는 무사 선발시험 날에 군사를 일으킨 폐단으로 인하여 지방의 도위(都尉)를 줄이거 전차와 기병을 관장하는 벼슬을 혁파하였으며, 송 태조는 당나라 말기에 번진[절도사]이 강했던 것을 보고 병사 하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이 직접 관리하였다. 그러나 후한은 병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외방이 약한 실수가 있었고, 송나라는 적국과 전혀 다투지 못할 정도로 전력이 허약한 걱정이 있었다.
 
 한 문제(BC 180 - 157)는 가의의 말을 받아들여 대신을 예우(禮遇)하고 형벌을 가하지 않게 하였는데, 그 말류(末流)의 폐단으로 대신이 모함을 당해도 스스로 하소연할 수 없었다. 당 태종(626 - 649)은 신하를 염치로 대하여 삼품 이상은 다른 죄수들과 같이 불러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하니 다른 죄수들은 불려와 정황을 이야기할 수 있었는 데, 도리어 귀한 신하는 불려오지 않아 잃는 것이 많았다.
 
 광무제(25 - 57)는 전한에서 여러 세대 동안 정권을 잃은 것을 거울 삼아, 삼공에게 아무 실권 없이 자리나 지키게 하고 정권을 대각[상서성, 그 당시의 비서실]에 돌아가게 하였다.
 
 예로부터 인재를 살피고 헤아려 등용하거나 내치는 것은 어려웠다. 한, 당 이후 어느 때는 재상이 주관하거나 또는 전조[이조와 병조]가 주관하였으나, 그 득실에 대해서는 후대 사람의 의논이 분분하였다. 위에 말한 네 가지는 모두 다스림의 도(道)와 관련이 있는데, 그 자세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문제의 앞부분을 다시 적었다. 조선시대의 다른 사람의 과거 답안을 보아도 이런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읽음으로 질문을 다시 생각할 수 있다.]
 
 신이 들으니,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二帝; 요임금과 순임금], 삼왕[三王; 하나라의 우왕, 은나라의 탕왕,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 문왕과 무왕은 부자(父子)이므로 한 임금으로 친다]은 마음을 보존하는 것으로 정치를 하는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법이 오래 되고 나서야 폐단이 생겼고 폐단이 생겨도 구제하기에 쉬웠습니다.
 
소위 '황제(黃帝), 요임금, 순임금이 일어나 그 변화에 통달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게으르지 않게 하며, 신령스럽게 교화시켜 백성으로 하여금 마땅하게 하였다[주역 계사편]'고 말한 것이 이것입니다. 후대의 임금은 마음을 보존하여 정치를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을 법에 의지하여 정치를 하니, 법에 한번 폐단이 생기면 다시 구제할 수 없어, 마침내 혼란하고 망하는 데 이르는 것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근보는 왕의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이 없이 일단 정치에 대한 기본 개념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청컨대, 신이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고조(BC 206 - 195)는 군국에 재관과 기사를 두고, 장안에는 다만 남북군의 숫자만 있고, 일이 있으면 새의 깃을 꽂은 격문으로써 군대를 소집하였다가 일이 끝나면 다시 혁파하였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한 고조는 필요하면 군대를 소집하였다가 전쟁이 종료되면 농사일에 돌려보내었다.]
 
무제(BC 142 - 87) 때에 이르러 비로소 남북군의 군사를 군국에게 번상(番上; 지방의 군사를 골라 뽑아 서울의 군영으로 보내는 일)하게 하였지만 장안에는 일정하게 머무는 병사가 없었습니다.
 
왕망(8 - 23)이 찬탈했을 때 도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나도 위병이 이를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적의[왕망을 토벌한 사람]는 전차와 기병(騎兵)으로서 군대를 일으키고, 또한 광무제도 이통의 계책을 써서 무사 선발 시험 날을 이용하여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마침내 한나라를 회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즉위 초에 군국[지방]의 도위[군 지휘관]를 줄이고 거기[병거와 기병]의 재관을 혁파하였습니다. 그 뒤로 힘센 신하가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렀으나 외방에 의탁할 만한 번진 세력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동탁이 군대를 일으켜 궁궐을 향하고, 원소와 조조가 각각 한 지역에 웅거하여 마치 자기 소유처럼 하였지만,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외방 병력이 강하고 중앙 병력이 약해서 일어난 폐단이 아니겠습니까?
 
 당나라 부병제[지방의 농민을 농한기에 훈련시켜 군사로 한 것]가 세 번 변하여 번진이 되었는데, 번진의 폐단이 극에 달하자 반란을 일으키는 장수와 힘센 신하가 천하에 늘어섰고, 조정의 정령이 미치는 곳이 한 곳도 없게 되어 결국 당나라는 망하였습니다.
 
 오대 말엽의 그 군신(君臣)들은 모두 번진에서 일어났습니다. 송 태조는 군대에서 지내서 그 사실을 직접 보았으므로 나라를 세운 초기에 왕심기, 석수신 등의 병권을 혁파하고, 조용히 술잔을 권하는 사이에 번진의 수백 년 폐단을 없애고 병사 하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에서 통제하였으니 잘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송 태조 조광윤이 자기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 신하들과 술을 같이 하면서 설득시켜 모두 병권(兵權)을 반납하고 낙향(落鄕)하게 한 일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나라가 점점 쇠약해져 도적이 사방에서 쳐들어왔고, 적들의 기세가 임금이 사는 수도의 코앞에 이를 때까지 무인지경을 달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외방에 충성을 다하여 구원하는 병사가 없어, 마침내 두 황제가 북에 포로로 잡혀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후 자손이 겨우 양자강 왼쪽을 보존하고 끝내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적국과 전혀 다투지 못할 정도로 전력이 허약했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후반부는 남송을 말한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해결 방안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질문에 관계된 중국의 역사적인 사실을 열거한다.]
 
 
 무릇 대신은 임금의 보좌이니, 대신이 존귀한 후에 임금의 세력도 높은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대부에게 형벌을 가하지 않았으니, 어찌 일반 서민들에게 하는 것처럼 경(얼굴에 문신을 하는 벌), 의(코를 베는 형벌)와 같은 치욕스런 형벌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한 문제는 가의가 조정에서 한 말을 받아들여 대부에게 형벌을 가하지 않았고, 당 태종은 정선과가 죄수 속에 섞여 나가는 것을 보고, 마침내 삼품(三品)이상의 대신은 일반 죄수와 더불어 함께 불러들이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대신을 예로서 대하는 아름다운 뜻이나, 그 말류의 폐단으로 주아부, 소망지, 유계, 장량(張亮; 당태종 때 사람, 한고조의 신하가 아님) 등이 원망을 품고 죽어 갔습니다. 어느 때는 대신으로 하여금 아무 하소연도 못하게 하고, 어느 때는 귀한 신하로 하여금 불려와 정황을 설명하지도 못하게 하였으니, 그 잃는 것이 또한 많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역시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도 새로운 대책을 논하는 일이 없이 과거의 일만을 설명하고 있다.
위에 적은 일 정도는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단지 문장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는 내 능력으로 판단하지 못한다.]
 
 정권은 임금의 큰 권한이니 하루라도 남에게 빌려 줄 수 없습니다. 전한(前漢) 말에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하여 태아(太阿; 중국 고대의 보검)를 거꾸로 잡아 [모반하여], 왕망이 끝내 작은 국량과 하찮은 재능으로 한나라의 정(鼎)을 몰래 옮겼습니다[나라를 빼앗았습니다].
 
 광무제가 그 폐단을 통렬히 경계하여 삼공의 권한을 없애고 정권을 대각[임주; 비서실]에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신하로 하여금 머리를 움츠리고 방관하게 하는 것은 임금이 대신을 신임하는 뜻이 아닙니다. 정권이 조정에 있으면 천하가 편안하고, 정권이 대각에 있으면 반드시 환관에게 돌아가고, 환관에게 돌아가면 조정이 혼란해집니다. 이것은 광무제가 눈앞의 잘못된 것을 경계하다가 후일의 걱정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현재 미국에서도 대통령 비서실과 행정부의 힘이 대통령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군자를 등용하면 나라가 다스려져 편안해지고, 소인을 등용하면 위태로워져 망합니다. 사람을 쓰는 것은 국가의 큰 권한이니 그 쓰고 버리는 기틀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재상에게 맡기는 것은 괜찮으나, 자격과 이력을 따져 서열을 매기는 것과 같은 자질구레한 일은 재상을 번거롭게 하는 일이니 전조에 맡기는 것이 좋습니다. 역대 임금이 두 가지 일을 모두 재상에게 맡기니 재상이 그 노고를 이기지 못하고, 두 가지 일을 오로지 전조에게 맡기니 전조에 권한이 편중되었습니다. 두 가지가 모두 그 마땅함을 잃었으니 후대 사람의 비웃음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 또한 어찌 괴이하겠습니까?
[임성삼의 주(註); 여기서 처음으로 근보의 답이 나온다. 결국 공무원의 인사권을 재상과 이부, 형부에 나누자는 의견이다. 세부적인 사항의 작성은 이부와 형부에서 작성하고 그것을 보고 결정하는 것은 재상이 하는 것을 제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제안의 실효성은 잘 모르겠다. 결국 조선시대에는 인사권을 이조와 형조에 맡겨 당파싸움이 여기서 일어나게 된 것은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싸움의 원인을 생각하자.]
 
 무릇 이 여러 임금은 모두 삼대[하, 은, 주 세 왕조] 이후에 크게 공적이 있는 군주입니다. 그들이 만든 법이 어느 때는 취할 만할 것이 있으나, 끝내 두 황제와 삼왕의 정치를 이루지 못한 것은 마음을 보존하는 것으로 정치를 하는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데에서 오는 변통이었습니다.
 
 맹자께서 "나는 요순의 도가 아니면 감히 임금 앞에서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고 하였으니, 신도 감히 여러 임금의 일을 전하께 아뢸 수 있겠습니까?

[임성삼의 주(註); 처음부터 지금까지 마음을 보존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 분의 일생이 이와 같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질문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답하지 않았다. 여기까지의 내용으로는 합격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신이 엎드려 성책(聖冊)을 읽어보니,
" 우리 조선에서는 고려의 사병(私兵)을 경계하여 모두 혁파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한 대신이 다시 사병의 이로움을 말했다.
 고려에서 대신을 욕보인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비록 죄과(罪過)가 있다 해도 죄를 직접 캐묻지 않고 여러 가지 증거로 죄를 정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죄 없이 모함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대신이 정권을 쥐고 흔든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임금에게 재결받도록 하여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또 말하기를 '승정원이 가진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정방이 외람되게 인사권을 행사한 폐단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이조와 병조가 분담하게 하였는데, 그 권한이 또한 크니 정방을 다시 설치하고 제조(提調; 큰 일이 있을 때 임시로 임명되어 그 관아를 다스리는 경우의 종 1 품, 또는 2 품인 경우. 정 1 품이면 도제조.)를 임시로 낙점하도록 하자는 대신이 있다.
 거론된 대신들의 네 가지 책(策)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또 다른 의견이 있는가?"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사병(私兵)을 두는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기"에 "무기, 갑옷, 투구 등 병장기를 사가(私家)에 보관하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임금을 위협한다는 것을 일컽는 것으로 신하에게 사병이 있으면 점차 반드시 그 임금을 위협하는 데 이른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고려말에 대신과 병권을 관장하는 자가 각각 도당(徒黨)을 심어 놓고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통치권을 빼앗아 마침내 나라를 위태롭게 하였습니다.
 우리 조선 초기에도 종실과 대신이 여전히 병권을 관장하였고, 이 때문에 부모 형제 사이가 서로 보존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이 때문에 공훈이 있는 신하가 좋은 끝맺음을 얻지 못했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을 겪은 후에 병권을 거두어들이고 삼군부[조선 초기 군무를 통괄하던 관청]에 패기[사병에 소속한 군인들의 군적을 기록한 장부]를 바치게 하였습니다.
 
나라에 정벌할 일이 있으면 장수를 보내 군대를 거느리게 하고, 일이 끝나면 병권은 다시 관(官)에 돌려보내고 장수는 사저에 돌아가니, 바로 옛날에 관리로서 장수를 삼고 백성으로 병사를 삼는 뜻입니다. 어찌 다시 사병을 두어 지나간 잘못을 되풀이하려 하십니까?

[임성삼의 주(註); 사병에 대해 제대로 정리된 답안이다. 간결하면서 정확한 내용이나 사병을 기르자고 주장한 사람은 어떤 의견이었는지에 대한 내용과 그 비판이 없다. 그 대신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인가?]
 
 
 대신을 예(禮)로 대우하는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중용"에 '구경(九經; 아홉가지 떳떳한 법)으로 천하를 다스린다'고 하여, 대신을 공경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진실로 대신은 임금의 팔과 다리로 하늘이 부여한 직위를 같이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대신하는 바이니 그에게 불경할 수 있겠습니까? 고려 때 간사한 소인들이 일을 꾸며 임금을 어둡게 가리고 대신을 천시하고 욕되게 하여, 때로는 먼 땅에 쫓아내거나, 혹 사형시며 시신을 여러 사람이 보도록 거리에 널어놓았으니, 결국은 갓과 신발을 뒤바꾸어 놓은 꼴이 되었습니다.
 
 공민왕(1352 - 1374) 때는 요망한 중 신돈이 권세와 재물을 마음대로 주물러 하루에도 명망 있는 대신을 10여 명씩 쫓아내고, 심지어는 임금의 명령이라 속이고 유숙을 교살하기까지 하였으나, 훈구대신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한(恨)을 삼켰습니다. 이후로 거의 한 해도 거른 적 없이 여러 차례 커다란 옥사(獄事)가 일어났으니, 대신이 당한 곤란과 재앙으로 입은 불행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조선에서는 여러 훌륭한 임금님이 대대로 이어, 아랫사람 대접하길 공손하게 하고, 대신을 존경하여 예로써 대하였습니다. 비록 불행하게 죄에 빠지더라도 직접 죄를 캐묻지 않고 여러 가지 증거로써 죄를 정하게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 심문하고 난 뒤에 의금부에 내려 다스리게 하되, 수갑이나 오랏줄을 풀어 주고 정실(正室)에 거처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날에 대신이 음란하여 남녀 문제를 분별없이 하면 더럽다고 말하지 않고, "유박(유箔; 남녀가 대면할 때 그 사이에 드리우는 발)을 제대로 드리우지 못했다"고 말하며,
나약하고 능력이 부족하여 임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나약하다고 말하지 않고, "대신이 거느리고 있는 아랫사람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뜻이니, 어찌 미리 죄 없이 무고함을 입어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습니까?
[임성삼의 주(註); 정통적인 대답을 하였다.]
 
 정권(政權)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려 때는 권신(權臣)이 정권을 제멋대로 휘둘러 강조가 목종(997 - 1009), 정중부가 의종(1146 - 1170)에게 한 처사에서 보듯이, 나라가 그들의 손아귀에 있고 임금을 바둑이나 장기처럼 마음대로 움직였습니다. 이로부터 권력이 아래로 이동하여 임금은 허울 좋은 이름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조일신, 김용(두 사람은 공민왕 때 권력을 잡았었음)의 무리에 이르러서는 임금의 권한을 훔치고 농락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고, 임견미 염홍방에 이르면 뇌물이 폭주하고 민전(民田)을 빼앗아 이들의 부(富)가 나라보다 많았습니다.
 우리 조정에서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임금의 결재를 받게 해서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게 한 것은 대개 이러한 폐단을 경계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육조와 여러 관서의 크고 작은 일을 반드시 먼저 의정부의 가부(可否)를 거친 뒤 승정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승정원은 단지 출납만을 관장하나 미처 의정부에서 의논하지 못한 것은 임시로 아뢰어, 혹 승정원이 가부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한두 가지 세세한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만약 중대한 일 같으면 후에 반드시 의정부에 보고하여 알게 합니다. 이러하니 승정원의 권한이 아주 큰 것은 아닙니다.
[임성삼의 주(註); 질문에 대한 답이기는 하나, 역시 정석(定石)적인 답이다.]
 
 
 정방(政房)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려 때에는 진양공 최충헌 부자가 4 대를 이어서 국가를 제멋대로 휘둘렀습니다. 그때 정방을 처음으로 만들고, 공공 관청을 개인 것처럼 여겨 젖내나는 자제를 정방의 승선으로 삼고, 당류(黨類)를 끌어들여 대각에 늘어놓게 하니, 관직을 임명한 것이 열흘만에 100여 개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 정방의 이름은 어느 때는 혁파되었다가 다시 회복되었다가 하였는데, 그 말세에 이르러 먹과 책으로 정무를 처리한다는 비난을 받기에 이르니 그 외람됨이 극에 달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정방을 설치하지 않고, 문무 관직을 선발하는 일을 모두 이조와 병조에 맡긴 것은 이런 폐단을 경계한 것입니다. 관리를 선발할 때 하는 일은 여러 관청의 공로와 잘못을 고찰하여 벼슬아치의 위계를 올리고 내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의정부의 한 사람이 관리를 선발하는 관직을 겸하여 전체를 총괄하여 이조와 병조를 견제하고 있습니다. 또한 비록 작은 일이라도 감히 전조에서 독자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모두 아뢰어 처리하고, 큰 일은 모두 의정부의 의견을 들어 처리합니다. 따라서 전조의 권한이 막중하다고는 할 수 없으니 어찌 정방을 다시 설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임성삼의 주(註); 확실하게 정방에 대해 반대하셨다. 역시 정방의 장점에 대한 것은 전혀 언급이 없다.]
 
 
 아아! 국가는 한 사람으로 주인(임금)을 삼고, 임금은 한 마음으로 주인을 삼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국가를 보면 국가는 지극히 크고 한 사람은 지극히 적어, 적은 것으로 큰 것을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지만, 한 마음으로서 국가를 보면 국가가 비록 크지만 임금의 마음이 오히려 크므로, 큰 것으로 큰 것을 움직이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이러하니 천하와 국가라는 큰 것을 가진 사람이 그 마음을 크게 하는 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직 밖으로 표현되기 전에 본심(本心)을 보존하고 기르며, 바야흐로 싹트는 때에 마음을 살피면, 온갖 일이 지극히 번잡하더라도 하나 하나 잘 다스릴 수 있고, 백관들이 비록 많더라도 한 사람 한 사람씩 부리는 이치를 얻게 될 것입니다. 어느 것인들 임금님 마음으로 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요, 순임금이 삼가고 두려워하며, 탕왕이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문왕이 공경하고 삼간 것이 모두 이 마음입니다.
 
 아아! 이 마음을 잡으면 보존하고 버리면 없어지나니, 마음을 보존하고 기르지 않을 수 없고, 그 뜻을 성실히 하고 앎을 지극하게 하는 데 마음을 성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학"에서는 이 마음으로 국가와 천하의 기틀을 삼았고, 동중서는 이 마음으로 조정 백관의 근본을 삼았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이제 삼왕의 마음으로 전하의 마음을 삼으면, 이제 삼왕의 정치를 이룰 수 있고, 앞으로 네 가지 법에서도 한, 당 이후에 있었던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반드시 법을 고쳐야만 지극한 정치[지치(至治)]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다만 오늘의 법을 지키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임성삼의 주(註); 질문을 넘어서서 질문의 본질을 꿰뚫고, 올바른 마음을 강조하며 자기의 주장을 말했다. 이것이 장원급제한 참 이유일 것이다.]
 
 공자께서 "이 나라에 살면서 함부로 대부를 그르다고 해서는 안된다."고 하셨으니, 신이 대신의 계책에 대하여 어찌 감히 가볍게 의논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임금께서 하문하셨으니 신은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아직 나이 어린 사람으로써 큰 일에 대해 말하였으니 겸손함을 보여야 한다.]
 
 신이 엎드려 성책을 읽어보니, "그대 대부들은 사책에 널리 통달하니 현실에 맞는 대책을 깊이 밝혀, 각자의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변변치 못한 학식으로 어찌 그것을 알겠습니까마는, 혹 망령되게 지난 일을 들은 바 있고, 혹 망령되게 오늘날 폐단을 본 바 있으니, 어찌 한두 가지 아뢸 수 있는 것이 없겠습니까? 짧은 시간이라 마음에 품은 바를 다하지 못하고 대략 대답하여 황공스러움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전하께서 재량하옵소서. 신이 삼가 대답합니다.
 
[임성삼의 이야기; 근보 성삼문의 이 답안은 주어진 문제에 대해 정밀하고 정확하게 대답하였다고 말하기 어렵다. 또한 현재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특별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답안이 장원에 뽑힌 이유를 생각하며 다음의 신숙주의 답안을 읽어보자.]
 

성삼문 成三問 1418∼1456(태종 18∼세조 2)   한메 디지탈 백과사전
 
조선 초기 문신.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 본관은 창녕(昌寧).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생.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도총관 승(勝)의 아들이다.
 
1438년(세종 20)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고, 47년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1442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세종의 명에 따라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펴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이개(李塏) 등과 이를 도왔으며, 명(明)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音韻)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하고 돌아와 46년 9월 29일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공헌하였다.
 
54년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이어 예조참의를 거쳐 55년 예방승지가 되었다. 그해 수양대군(首陽大君;뒤의 세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 선위(禪位)를 강요하여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박중림(朴仲林)·박팽년·유응부(兪應孚)·허조·권자신(權自愼)·이개·유성원(柳誠源) 등을 포섭하여 단종복위운동을 계획하면서 거사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56년(세조 2) 6월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 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원래는 아버지 승을 비롯한 무신들에게 운검(雲劒)으로 세조의 뒤에 섰다가 세조를 제거하도록 계획하였으나, 당일 아침에 갑자기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의 시립(侍立)이 폐지되자 그날의 거사는 일단 취소되고, 훗날 세조가 친히 거동하는 관가(觀稼) 때로 미루어졌다.
 
이와 같이 거사에 차질이 생기자 함께 모의하였던 김질이 그의 장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세조에게 밀고를 하여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갔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굴하지 않고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신하들의 불충을 꾸짖었다. 그달 8일에 아버지 승과 이개·하위지(河緯地)·박중림·김문기(金文起)·유응부·박정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하였다. 그 뒤 1691년(숙종 17) 신원되고,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무덤은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고 장릉(莊陵;端宗의 능)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매죽헌집》이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
 

신숙주의 답안
1447 년(세종 29 년) 중시에 을과급제
[임성삼의 주(註); 갑과는 3 사람이고, 앞의 성삼문은 이 갑과 중의 1 등이었다. 을과는 7 사람으로 신숙주는 을과의 몇 번째였는지는 모르겠다. 필원잡기(7 번째 책소개)를 쓴 서거정은 을과의 1 등이었다. 병과는 28 - 33 인을 뽑았다.]
 
 책문
 왕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임성삼의 주(註); 앞의 문제와 동일하다. 두 번 나왔으나 다시 한 번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고금의 일반적인 근심거리다.

 후한(後漢)에서는 무사 선발시험 날에 군사를 일으킨 폐단으로 인하여 지방의 도위(都尉)를 줄이거 전차와 기병을 관장하는 벼슬을 혁파하였으며, 송 태조는 당나라 말기에 번진[절도사]이 강했던 것을 보고 병사 하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이 직접 관리하였다.
그러나 후한은 병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외방이 약한 실수가 있었고, 송나라는 적국과 전혀 다투지 못할 정도로 전력이 허약한 걱정이 있었다.
 
 한 문제(BC 180 - 157)는 가의의 말을 받아들여 대신을 예우(禮遇)하고 형벌을 가하지 않게 하였는데, 그 말류(末流)의 폐단으로 대신이 모함을 당해도 스스로 하소연할 수 없었다. 당 태종(626 - 649)은 신하를 염치로 대하여 삼품 이상은 다른 죄수들과 같이 불러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하니 다른 죄수들은 불려와 정황을 이야기할 수 있었는 데, 도리어 귀한 신하는 불려오지 않아 잃는 것이 많았다.
 
 광무제(25 - 57)는 전한에서 여러 세대 동안 정권을 잃은 것을 거울 삼아, 삼공에게 아무 실권 없이 자리나 지키게 하고 정권을 대각[상서성, 그 당시의 비서실]에 돌아가게 하였다.
 
 예로부터 인재를 살피고 헤아려 등용하거나 내치는 것은 어려웠다. 한, 당 이후 어느 때는 재상이 주관하거나 또는 전조[이조와 병조]가 주관하였으나, 그 득실에 대해서는 후대 사람의 의논이 분분하였다.
 
위에 말한 네 가지는 모두 다스림의 도(道)와 관련이 있는데, 그 자세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조선에서는 고려의 사병(私兵)을 경계하여 모두 혁파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한 대신이 다시 사병의 이로움을 말했다.

 고려에서 대신을 욕보인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비록 죄과(罪過)가 있다 해도 죄를 직접 캐묻지 않고 여러 가지 증거로 죄를 정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죄 없이 모함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대신이 정권을 쥐고 흔든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임금에게 재결받도록 하여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또 말하기를 '승정원이 가진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정방이 외람되게 인사권을 행사한 폐단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이조와 병조가 분담하게 하였는데, 그 권한이 또한 크니 정방을 다시 설치하고 제조(提調; 큰 일이 있을 때 임시로 임명되어 그 관아를 다스리는 경우의 종 1 품, 또는 2 품인 경우. 정 1 품이면 도제조.)를 임시로 낙점하도록 하자는 대신이 있다.

 거론된 대신들의 네 가지 책(策)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또 다른 의견이 있는가? 그대 대부들은 사책(史策)에 널리 통달하니 현실에 맞는 대책을 깊이 밝혀, 각자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
 
 
대책
 삼가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지영수성(持盈守成; 가득 찬 것을 유지하고 이룬 것을 지킴 - 창업한 것을 이어 받아 지키는 것)하시어 정사(政事)에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는 데 뜻을 두시고, 널리 뛰어난 인물을 구하려고 궁전 뜰에서 책문을 내시어 역대의 득실 자취를 헤아린 뒤 오늘의 폐단을 없애는 방법을 듣고자 하시니, 신이 비록 우매하나 생각을 말씀드려서 임금님 책문에 만 분의 일이나마 답할까 합니다.
 
 신이 엎드려 성책을 읽어보니,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고금의 일반적인 근심거리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들으니,
"창업하는 것과 수성하는 것은 형세가 다른 것으로,
창업하는 정사는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손익(損益)을 헤아리고 폐단을 없애 그치게 하며,
수성하는 정사는 옛 법을 따르고 삼가 지켜 폐단을 없애서 그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본인이 어디서 들었는지를 말하지 않고 있다. 감점의 요인이 될 수 있다. 특히 첫 머리 부분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말을 인용하는 것은 약간 문제가 있다. 그러나 문제의 요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풀어나갈 근거를 마련하였다.]
 
 예전에 한(漢)나라가 일어났을 때, 진(秦)나라의 형법이 가혹하여 예악(禮樂)이 사라졌으므로, 가의와 동중서는 이를 탄식하고 법을 세우고 제도를 고치는 것을 일삼았으며, 후대 사람은 이 두 사람의 주장을 듣고는 제왕의 다스림은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망령되게 고쳐서 임금을 현혹시키는 것이 어찌 수성하는 도(道)이겠습니까?
 
 신이 엎드려 성책을 읽어보니,
 "후한(後漢)에서는 무사 선발시험 날에 군사를 일으킨 폐단으로 인하여 지방의 도위(都尉; 군사 담당관)를 줄여 전차와 기병을 관장하는 벼슬을 혁파하였으며, 송 태조는 당나라 말기에 번진[절도사]이 강했던 것을 보고 병사 하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이 직접 관리하였다. 그러나 후한은 병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외방이 약한 실수가 있었고, 송나라는 적국과 전혀 다투지 못할 정도로 전력이 허약한 걱정이 있었다.
 
 한 문제(BC 180 - 157)는 가의의 말을 받아들여 대신을 예우(禮遇)하고 형벌을 가하지 않게 하였는데, 그 말류(末流)의 폐단으로 대신이 모함을 당해도 스스로 하소연할 수 없었다. 당 태종(626 - 649)은 신하를 염치로 대하여 삼품 이상은 다른 죄수들과 같이 불러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하니 다른 죄수들은 불려와 정황을 이야기할 수 있었는 데, 도리어 귀한 신하는 불려오지 않아 잃는 것이 많았다.
 
 광무제(25 - 57)는 전한에서 여러 세대 동안 정권을 잃은 것을 거울 삼아, 삼공에게 아무 실권 없이 자리나 지키게 하고 정권을 대각[상서성, 그 당시의 비서실]에 돌아가게 하였다.
 
 예로부터 인재를 살피고 헤아려 등용하거나 내치는 것은 어려웠다. 한, 당 이후 어느 때는 재상이 주관하거나 또는 전조[이조와 병조]가 주관하였으나, 그 득실에 대해서는 후대 사람의 의논이 분분하였다. 위에 말한 네 가지는 모두 다스림의 도(道)와 관련이 있는데, 그 자세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들으니, "군사력은 중앙이 약하면 외방이 강하고, 외방이 약하면 중앙이 강하니, 이것이 고급의 일반적인 근심거리다."라고 합니다.
군사력이, 중앙이 약하고 외방이 강한 시대는 전한(前漢), 당과 오대 말엽이고, 외방이 약하고 중앙이 강한 시대는 후한과 조송[임주(任註); 조광윤의 송, 당송 팔대가라고 할 때의 송나라]입니다.
 전한은 외방에 도위, 전차와 기병의 재관을 두어 울타리로 삼았으니, 외방의 병력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쇠약해지자 동군의 태수인 적의가 무사 선발시험에서 전차와 기병을 훈련시켜 군현에 격문을 돌렸으며, 이통은 광무제에게 군대를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는데 또한 무사 선발시험하는 날이었습니다. 대오(隊伍)의 선두에 서 있는 대부와 아랫벼슬아치를 위협하여 그것으로 대중을 호령하고자 하였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시험 문제의 주제에 대해 일반적인 법칙을 만들고, 그에 대한 실제 예를 들었다.]
광무제가 중흥하자, 그 폐단을 익히 알아 재위 6 년에 군국의 도위를 없애고, 7 년에 전차와 기병의 재관을 혁파하고, 9 년에 관중의 도위를 없앴으니 외방의 병력이 강한 폐단을 혁파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쇠약해지자 외방 번진의 구원이 없고, 힘센 신하들이 거리낌없이 정치를 마음대로 휘둘렀습니다. 그 후 비록 자사(刺史)를 고쳐 주목(州牧)을 두었으나, 한나라는 결국 셋으로 나뉘고 말았습니다. [임주; 삼국지의 시대가 된 것임]
한 가지 폐단을 없애기 위해 너무 심하게 고쳤기 때문에 또 다른 폐단이 생긴 것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신숙주가 열심히 공부한 것이 보이는 대목이다. 광무제 재위 몇 년에 어떤 조처를 취한 것인가를 명확히 알고 있다.]
 
 당과 오대 말엽에 외방 병력이 강한 폐단이 극에 달해, 번진이 제멋대로 날뛰어 넷으로 나뉘고 다섯으로 쪼개져 끝내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송 태조는 군대에서 지냈으므로 그 폐단을 잘 알았습니다. 즉위하자 조보의 계책을 받아들여 술 마시는 자리에서 부드럽게 장수들의 군사권을 약화시키고, 왕심기 등의 병권을 빼앗아 수백 년 간 이어온 번진의 폐단을 제거하고 병사 하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에서 관리하였으니, 외방의 병권이 강한 폐단을 혁파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여기의 '조보'는 전에 소개한 다음의 말을 한 사람이다.(21 번째 책소개; 논어 전반부)
 
臣有 論語一部 以 半部 佐太祖 定天下 以半部 佐 陛下 致太平
신유 논어일부 이 반부 좌태조 정천하 이반부 좌 폐하 치태평
"저는 논어 한 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반권으로 태조[여기의 송 태조]를 도와 천하를 평정했으며,
나머지 반권으로 폐하를 도와 천하를 안정시켰습니다."
 
전에 약속했던 대로 논어의 나머지 반 권도 곧 여러분에게 소개하려 한다.]
 
그런데 나라가 쇠약해져 구적[여진족]이 침범하매 강한 울타리의 보호가 없으므로, 군현이 뿔뿔이 흩어져 맥을 못 추었습니다. 금(金)나라 사람이, 무인지경을 달려온 것처럼, 남쪽으로 내려온 지 며칠만에 도성 아래에 이르렀고, 순식간에 두 황제가 북으로 잡혀갔으며, 도망가 숨을 겨를도 없어 겨우 강동(江東)만 보존하고 마침내 떨쳐 일어나질 못했으니, 이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왕망(8 - 23)이 찬탈하여 법령을 까다롭게 만들어 손만 까닥 흔들어도 금령에 저촉되니 모두 일어나 도적이 되었고, 더구나 사람들은 다시 한나라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찌 이것이 오로지 외방의 병력이 강한 죄뿐이겠습니까? 휘종(1101 - 1125)과 흠종(1126) 때 채경이 재상이 되어 새파란 애송이를 줄줄이 장수로 세워 방자하게 강한 적을 건드리고도 오히려 스스로 돌이킬 줄을 몰랐으니, 설령 병력이 약하지 않았더라도 어찌 쇠미해지지 않았겠습니까?
[임성삼의 주(註); 앞의 답안에 비하여 내용이 자세하다. 여기의 채경은 "수호지"에서 나오는 그 인물이다.]
 
 또 임금은 대신을 예로 높여 공경히 존중해야 하니 어찌 일반 서민들처럼 경, 의, 곤( ; 머리 깎는 형벌), 태(笞; 볼기 칠 태)를 내리겠습니까?
이 때문에 가의가 대신을 예에 합당하게 공경할 것을 정성껏 아뢰었고, 한 문제는 대신들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당 태종이 죄수를 불러들여 심리한 적이 있는데, 기주자사 정선과에 미치자 태종이 말하길, "선과는 관품이 낮지 않은데, 어찌 다른 죄수들과 같은 대오 속에 있을 수 있는가?"하고 묻고는 마침내 삼품 이상은 다른 죄수들과 같이 불러들이지 않았습니다. 호인이 이를 논하여 말하길, "신하를 염치의 도로 대우하는 것은 얻었으나, 다른 죄수들은 불려와 정황을 하소연할 수 있는데, 귀하고 가까운 신하들은 도리어 불려오지 않아 죄 없이 모함을 당하고 원통하게 누명을 써도, 스스로 진달할 길이 없으니 그 폐단 또한 크다."고 하였습니다.
 그후 소망지, 양운, 유계, 장량의 일은 모두 사람들 마음을 찜찜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대신에게 원통함이 있어도 고할 기회를 없게 하여 존중한다는 것이 도리어 해치는 것이 되었으니, 이 어찌 대신을 공경하고 중히 여기는 뜻입니까?
 
 신은 가의가 대신에게 형벌을 가하지 말도록 아뢴 것은 옳다고 생각하나 자살하는 단서를 열게 한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태종이 대신을 일반 죄수들과 같이 불러들이지 않게 한 것은 옳으나 어찌 따로 불러들이지 않은 것입니까?
[임성삼의 주(註);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이 된다.]

서산 진씨는 말하기를 "대신이 죄가 있으면 자살을 하게 하여 참으로 오랏줄로 묶이고 매질을 당하는 치욕을 면하게 했으나, 그 폐단은 대신이 죄 없이 모함을 당해도 감히 스스로 하소연하지 못하고 아무 변명도 못하고 죽게 한 것이니, 삼대에는 분명 이와 같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권은 임금의 큰 권한이니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한 말에 태아[칼 이름]를 거꾸로 잡고 힘센 신하들이 권력을 주물러서 왕망에 이르러서는 작은 국량과 하찮은 재능으로도 힘들이지 않고 한나라의 정(鼎)을 옮겼습니다. 그 후 광무제가 중흥하자 여러 세대 동안 정권을 잃었던 것에 분개하고 깊이 생각하여 원대한 계책을 세워 여러 장수를 모두 후(侯)로 봉하되 일은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삼공(三公)의 권한을 제한하고 모든 권한을 총괄하였으니, 스스로 전대(前代)의 폐단을 모두 없앴다고 여겼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대신에게 믿음으로 맡기는 것이 고금의 통의(通義)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이러면 대신이 왕망처럼 나라를 빼앗을 수 있다. 이 주장을 어떻게 뒷받침하는지 살펴보자.]
어찌 삼공으로 하여금 자리만 갖추게 하고 도리어 대각에게 임금의 권한을 잡게 할 수 있습니까?
환관의 권세가 성하여 당고의 화(禍)[후한 환제 때 환관들의 정치 농단을 막으려다가 오히려 신하들이 벌을 받은 것]가 일어났으나, 삼공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방관만 하였고, 감히 누구라도 어떻게 조치하지 못하는 번왕(藩王)과 여러 장수들로 인하여 한나라가 결국 망하였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위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좋은 논리이다. 모두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선유(先儒; 과거의 유학자)가 이에 대해 논하기를, "굽은 것을 고치려다 바른 것을 지나쳤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올바른 지적입니다.
 
 사람을 쓰는 것은 나라의 큰 권한이니, 인재를 뽑는 권한을 맡기는 것은 살피셔야 합니다.
재상에게 맡기는 것이 마땅하되, 자격과 이력을 따져 서열을 매기는 것은 재상을 번거롭게 하므로 적절하지 못합니다. 서열을 매기는 것은 전조에 맡기는 것이 마땅하되, 인재를 등용하거나 내치는 것까지 모두 전조에 맡겨서는 안됩니다.
한, 당에서 역대로 어느 때는 재상에게 맡겼다가 하루 종일 땀을 뻘뻘 흘려도 그 번거로움을 감당하지 못했고, 어느 때는 전조에 맡겼다가 권세가 편중되어 체통을 잃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후대 사람의 논박을 면하지 못합니다.
[임성삼의 주(註); 인사권을 둘로 나누자는 의견이다. 재상을 신임하여 인사권을 주되 서열을 매기는 것은 다른 곳에서 한다. 앞의 논리와 일치한다. 근보 성삼문도 이와 비슷한 주장이었으나 신숙주의 주장이 더 명쾌하다.]
 
 신이 엎드려 성책을 읽어보니
" 우리 조선에서는 고려의 사병(私兵)을 경계하여 모두 혁파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한 대신이 다시 사병의 이로움을 말했다.
 고려에서 대신을 욕보인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비록 죄과(罪過)가 있다 해도 죄를 직접 캐묻지 않고 여러 가지 증거로 죄를 정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죄 없이 모함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대신이 정권을 쥐고 흔든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임금에게 재결받도록 하여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또 말하기를 '승정원이 가진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정방이 외람되게 인사권을 행사한 폐단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이조와 병조가 분담하게 하였는데, 그 권한이 또한 크니 정방을 다시 설치하고 제조(提調; 큰 일이 있을 때 임시로 임명되어 그 관아를 다스리는 경우의 종 1 품, 또는 2 품인 경우. 정 1 품이면 도제조.)를 임시로 낙점하도록 하자는 대신이 있다.
 거론된 대신들의 네 가지 책(策)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또 다른 의견이 있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들으니 "천운(天運)은 순환하여 비괘가 극에 달하면 태(泰)괘가 온다."고 하였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주역에 나오는 말로 논리를 시작하였다. 그 당시에는 주역에 나온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으니 출처를 적지 않았다.]
 우리 동방은 고려말부터 나라가 어지럽고 정치가 어두워졌는데, 우리 태조(1392 - 1398)께서 하늘에서 내려 준 성인의 덕을 갖춤으로써 운수에 부응하여 나라를 열었습니다. 뒤이어 여러 훌륭한 임금들이 옛날을 헤아리고 오늘을 살피어, 나쁜 법을 모두 혁파하였습니다. 그러나 천하에 폐단이 없는 법이란 없으므로, 진실로 성책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하나하나 진술해 보겠습니다.
 
 사병을 혁파한 것은 고려의 권신들이 제멋대로 날뛴 폐단을 경계한 것입니다. 사병의 설치는 처음에 서울에 거주하면서 왕실을 호위하고자 한 것인데, 그 폐단으로 임금이 약해지고 신하가 강해져 갓과 신발을 바꾸어 놓은 꼴이 되어 사병을 혁파해야만 했습니다.
태평한 세월이 오래 지속되니 군사의 방비가 해이해지고, 장수가 병사를 알지 못하고 병사가 장수를 알지 못하면, 갑자기 군사를 쓸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사병을 설치하자는 요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다시 사병을 키우자는 의견이 나오게 된 이유를 정확히 말하였다.]
 
 대신이 죄가 있어도 직접 대놓고 캐묻지 않은 것은, 고려에서 대신을 낮추고 욕보인 폐단을 경계한 것입니다. 고려에서는 대신에게 사정없이 볼기를 치고, 죄인을 죽이는 데 쓰는 도끼와 쇠모탕으로 죽이니, 이 어찌 예로써 높이고 공경히 존중하는 뜻입니까? 이 때문에 대신을 욕보이는 것을 혁파하지 않을 쑤 없었습니다. 그러나 의심나는 옥사는 밝히기 여려운데다 간사함이 날로 늘어나, 여러 증거로 죄를 결정해도 반드시 애매 모호하여 원통하게 죄를 입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죄 없이 모함을 받는다는 탄식이 있게 된 것입니다.
 
 대신이 정사를 제멋대로 하는 것을 혁파한 것은 고려의 대신이 외람되이 권력을 남용한 폐단을 경계한 것입니다. 우리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의정부가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임금께 아뢰어 재가를 받도록 했는데,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가 권력을 잡게 되어 권한이 승정원[왕명의 출납을 맡은 기관]에 돌아가니, 이 때문에 승정원의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정방을 혁파한 것은 고려에서 인사권을 외람되게 행사한 폐단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조선에서 이조와 병조가 그 권한을 나누어 관장하여 인물을 등용하거나 내치도록 하였는데, 화복(禍福)을 제멋대로 주물러 권세가 너무 크니, 이 때문에 그 권세가 너무 크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여기까지 질문을 다시 분석하였다. 그러나 특별한 점은 없다.]
 
 고려의 잘못된 것을 거울 삼아 새로 개혁한 네 가지는 폐단이 없을 것 같은 데도 폐단이 생겼고, 개혁한 네 가지에 대한 대신의 이견(異見)은 온당한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온당치 못합니다.
 신이 가만히 네 가지 폐단을 거슬러 올라가 생각하니, 반드시 그렇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네 가지 폐단을 없애는 방법은 사람을 임용하는 데 있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네 가지 질문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을 제시한다.]
 
대체로 법에 폐단이 없을 수 없는 것은 오성육률[임주(任註); 음악을 말한다]에 음탕한 음악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선왕은 대략적인 것만 남겨 두고 사람에게 맡기어, 진실로 백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면 억지로 없애지 않았으니, 전부를 변경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입니다.
 
 사병을 폐단을 혁파하는 것은 후한의 광무제와 송 태조가 줄기를 강하게 하고 가지를 약하게 한 뜻을 본받되, 항상 슬기롭게 사기(士氣)를 진작시켜 해이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대신을 낮추고 욕보이는 폐단을 혁파하는 것은 당 태종과 가의가 대신을 존중한 뜯을 본받되, 항상 의심나는 옥사가 있을 때는 그 애매 모호한 것을 신중하게 살펴 간사함이 날로 불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정사를 제멋대로 결정하는 폐단을 혁파하려면 크고 작은 일을 반드시 의정부를 거치게 하고, 승정원은 삼가고 경계하도록 하십시오. 다만 오늘날의 제도에 견주어서 광무제가 삼공은 자리만 지키고 정권은 대각에 돌아가도록 한 것처럼 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정방의 폐단을 혁파하려면 이조와 병조가 인사권을 주관하고, 의정부 역시 관리를 등용하거나 내치는 권한에 참여하도록 하십시오. 다만 오늘날의 제도에 견주어서 믿음으로 맡기어 후대 사람의 비판을 면하는 것이 옳습니다.
[임성삼의 주(註); 온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네 가지 큰 질문에 위와 같이 간단히 대답하였다. 답안의 중심이다. 어딘지 허전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아무리 부피가 많은 책이라도 핵심은 간단한 법이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져도, 그 근본은 반드시 사람을 임용하는 데 있습니다.
적임자가 있는데 쓰지 않거나, 쓰되 그 말을 행하지 않거나, 그 말을 행하되 그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비록 날마다 그 법을 백 번 바꾼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신은 네 가지 폐단을 구하는 것은 사람을 쓰는 데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밑줄친 부분은 '중용'의 내용을 확대한 것이다. 신숙주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의 임용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말하지는 않았다.]
 
 신이 엎드려 성책을 읽어보니,
"그대 대부들은 사책에 널리 통달하니 현실에 맞는 대책을 깊이 밝혀, 각자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고루하니, 이 짧은 시간에 품은 생각을 어찌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임성삼의 주(註); 아는 것이 많은데 시간이 없다는 의미인데 정작 위의 답은 중요한 부분이 상세하지 못하고 매우 짧다.]

신이 들으니, 향리에서 추천하는 법을 폐지한 이후에 과거 제도가 생겼다고 합니다.
한 무제가 처음 천하에 조서를 내려 어질고 바르며 곧은 말로 간쟁하는 선비를 추천하라고 하니, 동중서의 무리가 충직한 말과 곧은 의논으로 책문에 답한 것이 지금까지 전해 옵니다.
그러니 예나 지금이나 책문을 내어 선비에게 물어 마음껏 토로하는 언로(言路)를 연 것은, 그 당시 정치의 폐단을 듣고 세상을 구제하는 방법을 얻고자 한 것이니, 이는 다만 과거 응시자를 시험할 뿐이 아닙니다. 선비를 뽑는 데 대책(對策)으로 하는 것이 역시 좋은 법입니다.
 
 후세에 이르러, 임금은 겉치레로 옛일을 본떠 책문을 내고, 아랫 사람의 대책은 다만 문장이나 멋들어지게 만들어, 문장의 교묘함과 졸렬함을 비교하여 자신을 파는 매개로 삼으니, 이는 윗사람으로 인하여 빚어진 결과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서거정의 필원잡기에도 간혹 과거에서 문장만을 꾸미는, 과거장에서 늙은 사람이 뽑히는 경우가 있었다고 비판하였다. 이와 같은 생각이다.]
 
 당 문종(827 - 840)이 천자가 문제를 내는 임시과거에서 친히 책문을 내고 유분이 허심탄회하게 답하니, 시험관 풍숙이 탄복했으나 감히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역자 주(註); 유분의 글이 당시 세력이 있던 환관의 비리를 공박하는 내용이었으므로 시험관 풍숙이 감히 뽑지 못하였다. 이 때 합격된 이태라는 사람이 말하였다. "유분이 떨어지고 우리가 합격하다니 낯이 부끄럽다."]
희녕 연간(1068 - 1077)에 왕안석이 정권을 잡았는데, 공문중이 대책에서 신법(新法; 왕안석이 마련한 법)을 문제삼자 마침내 천자가 문제를 내는 임시과거를 폐지했으니, 그 말의 곧음을 미워한 것입니다.

 말하게 하고 나서 절실한 것을 두려워하고 곧은 것을 미워한다면 어찌 허심탄회한 언로를 열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선비들이 날로 너도나도 교묘하게 속이는 데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지금 계속되는 부분은 과거시험 자체에 대한 내용이므로 어떤 문제가 출제되어도 통용되는 내용이다. 이 부분은 미리 준비가 가능하다. 앞에서 근보 성삼문께서 준비한 내용과 비교하여 보라.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주상 전하께서 친히 문제를 내어 선비들에게 물으시니, 이는 언로를 열고 오늘의 폐단을 물으셔서 이른바 세상을 구제하는 방법을 구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유분처럼 극언(極言)을 하고, 공문중처럼 신법을 논해도 당연히 받아들이려 하실 것이니 신이 감히 숨기는 바가 있겠습니까?

 오늘의 폐단 중에 이 네 가지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강이 떨치지 못하고, 조정은 날로 허물어지고, 민생은 어렵고, 하늘의 변고가 여러 차례 보이고, 풍속이 야박해지고, 탐욕스럽게 마음껏 거두고, 절의를 닦지 않고, 억울한 옥사가 넘치고, 도적이 횡횡하는 것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이 해가 세종 29 년인 1447 년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현명하고 백성을 위한 왕 중 한 분이셨던 세종께서 29 년이나 다스린 결과를 신숙주는 이렇게 평하였다. 더욱이 신숙주는 1438 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관리에 올라 거의 10 년을 근무한 때에 이 답을 작성하였다.]
 
 신은 토붕지환(土崩之患; 흙이 무너지듯 조직이나 사물이 근본적으로 무너져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이 한(漢)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앞서 말한 네 가지 폐단을 구하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언로를 널리 여시어 직언(直言)을 받아들이고, 날마다 대신과 더불어 그것을 구제할 방도를 강구하여 행하시면, 사계절처럼 미덥고 금석(金石)처럼 견고해서 누적된 폐단을 구제하기 어려울까 근심하실 필요가 없을 것이니, 나라와 온 백성에게 매우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임성삼의 주(註); 신숙주는 그 당시의 우리나라의 상황을 이렇게 비관적으로 보았으니, 그 상황을 고쳐 나라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을 지 모른다.
 6 년 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는 계유정란에 신숙주가 가담해 정난공신 1 등에 오른 것은 나라의 상황에 대한 위와 같은 인식이 바탕이 되었을 수도 있다.]
 
[임성삼의 이야기;
처음 읽은 후에는 신숙주가 더 정밀하고 좋은 답을 썼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읽어볼 때는 근보 성삼문을 장원으로 뽑은 세종대왕의 뜻을 알 것 같았다.
 이 시험은 대학입학을 위한 것이 아니고, 조선을 이끌어갈 인물에게 일종의 권위를 주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께서는 모든 일을 바른 마음을 기본으로 판단하는 인물이 나라를 이끌어가야 된다고 생각하셨음을 알 수 있다. 후일 두 사람의 행동을 보면 세종대왕이 옳으셨다.
 
그러나 신숙주가 상황을 분석하여 일을 이루는 능력이 뛰어난 것이 이 답안에서 보인다. 결과적으로 영의정까지 되어 많은 일을 하였으나 일 처리에 별로 실수가 없었다.
 
신숙주는 58 세에 죽으면서, "세상이란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을!"라고 말했다 한다. 그가 말년에 지은 시를 소개한다.(원래는 한시)
 
양덕 가는 길에 우연히 읊조린다
 
작년에 이 하나 빠지고
금년에 머리카락 한 올 세었네.
늙음을 면치 못함이야 알고 있지만
어찌 이리도 서로들 재촉하나.

분주하여 여전히 쉬지 못함은
만리 밖이 검극(劍戟)을 일삼는 탓.
공명(功名)과 업적이야 취할 바 아니지만
헛된 명성은 이미 극진했지.
바라건대 이제는 잠불(簪 ; 비녀 잠, 인끈 불; 벼슬을 말함)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우졸(迂拙; 멀 우; 작가 자신)이나 보전하리.]
 

신숙주 申叔舟 1417∼1475(태종 17∼성종 6) 한메 디지털 대백과사전
 
조선 초기 문신.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보한재(保閒齋). 본관은 고령(高靈).
 
 1438년(세종 20)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친시문과에 급제, 41년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42년 서장관으로 일본에 건너가 시명을 떨치고, 귀국 도중 쓰시마섬〔對馬島〕에 들러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했다. 그 뒤 세종의 명으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유배중이던 명(明)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찾아가 음운에 관한 지식을 얻어 훈민정음 편찬에 큰 공을 세웠다.
 
 47년 집현전응교가 되었고, 53년(단종 1) 부승지가 되어 계유정란에 참여해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훈되고, 곧 도승지에 올랐다.
[임성삼의 주(註);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할 때 지금의 청와대 비서관이었다. 이 때의 병조판서는 정인지였다고 기억한다. 즉 수양대군은 국방장관과 대통령 비서관이 자기 편이었던 것이다.]
 
 
55년 수양대군이 즉위한 뒤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고령군에 봉해졌고, 다음해에 병조판서·대사성 등을 지냈다. 57년 우의정에 오르고 59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60년 강원·함길도의 도체찰사로서 모련위(毛憐衛)의 야인을 정벌, 62년 영의정이 되었다.
 
예종이 즉위하자 곧 원상(院相)이 되었고, 68년 남이(南怡)를 숙청한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이 되었으며, 71년(성종 2)에 좌리공신 1등에 책록, 영의정에 재임되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런 화려한 경력의 사람으로는 앞에 소개한 시가 너무 쓸쓸하지 않은가?]
 
 
72년에는 《세조실록》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탁월한 학식과 문재로써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동국정운(東國正韻)》 《국조보감》 《영모록(永慕錄)》등을 찬수했으며, 《보한재집》 《북정록(北征錄)》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사성통고(四聲通攷)》 등의 저서를 지었다. 또한 글씨를 잘 썼는데, 전하는 것으로는 《몽유도원도》의 찬문(贊文)과 해서체의 《화명사예겸시고(和明使倪謙詩稿)》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

조선 초기의 여러 사람들의 생존연대를 다시 정리해 본다.
 
태조  1335
정몽주     鄭夢周/1337~1392
정도전           1337
유관         柳寬/1346~1433           우산으로 천하가 새는 것을 막다 - 지봉의 말
하륜         1347
권근          權近/1352~1409
길재           吉再/1353~1419          정종이 내린 땅에 대나무를 심다.
안성            安省                               남길 것은 청렴 렴자
맹사성        孟思誠/1360~1438 
영락제 1360-1424                 1399 거병
황희              黃喜  1363~1452
태종              1367                         1398 왕자의 난
변계량 1369 - 1430
윤회 1380
김종서 1390 - 1453
정인지 1396 - 1478
세종  世宗/1397~1450     재위 1418∼50              53 세에 승하
정갑손   鄭甲孫/?~1451)   부들 자리에 무명 이불 - 곧은 말, 거침없는 행동
구치관  具致寬/1406~1470  세조가 말했다. "그는 나의 만리장성"
문종   文宗/1414~1452 재위 1450∼52
세조   世祖/1417~1468 재위 1455∼68            51 세에 죽음, 38 세에 조카를 퇴위시키고 13 년 재위
기건   奇虔/?~1460(정성 건) 세조가 다섯 번 찾아가 벼슬하기를 청했으나 거절, 연안 부사할 때 붕어 안먹음, 제주도에서 근무할 때 복어, 전복 안먹음
박팽년 朴彭年/1417~1456
신숙주 1417 - 1475         1438  1439   1447 급제
성삼문 1418 - 1456  1438 급제   1447 장원
 
서거정 1420 - 1488
김시습   金時習/1435~1493
남이 1441 - 1468
남효온  南孝溫/1454~1492
가끔 호구들이 있어야 경제가 살기는 하지만, 호구-정상인을 판별하는 기준을 알려드리지요.

------ 상식1 -----------

HDMI 케이블이라고 모두 같은 케이블은 아닙니다. IDE케이블에도 40핀/80핀이 있었듯이 HDMI에도 핀수, 케이블에 따라서 규격이 달라집니다. (참고로, 단자가 금도금이냐 은도금이냐, 구리냐는 전혀 상관없음... 금도금 단자 쓰는 것이야말로 호구 인증).

타입 A = 19핀 단자.
타입 B = 29핀 단자. 전송 대역폭이 2배. (단점: 아직 지원하는 기기 존재 안함 ㅋㅋㅋ)
타입 C/D = 19핀 단자. 단, 커넥터 모양이 Mini, Micro로 되어 있음.

결론 ==> 아무 타입이나 모양 맞는 것 써라.

------ 상식2 -----------

케이블에도 규격이 있습니다. 두가지 규격이 있는데,

카테고리1 = 74.5MHz 까지 전송 가능 (1080i 까지 지원)
카테고리2 = 340MHz 까지 전송 가능 (1080p 이상, 3D 등)

두 케이블의 차이는 케이블 내의 각 신호선의 굵기가 얼마냐에 따른 규격입니다. 카테고리1은 얇은 선, 카테고리2는 좀 굵은 선들로 만들었죠. (기술적으로 말하면 카테고리1은 28AWG, 카테고리2는 24AWG 이상...)

현실에 적용해보면, 카테고리1은 5미터 이내, 카테고리2는 15미터 이내의 전송에 적합합니다. 지금은 대부분 기기가 1080p이기 때문에, 길이에 관계없이 카테고리2를 써야겠죠. 하지만, 카테고리1 케이블을 쓰더라도 길이가 5미터 이내면 카테고리2의 속도를 견딜수 있습니다.

결론 ==> 5미터 이내는 카테고리1 또는 카테고리2 상관 없고, 5미터 이상되면 카테고리2 케이블을 써라.

------ 결론 -----------

케이블이 카테고리2로 되어 있으면 아무 케이블이나 써도 됩니다. 5미터 이내면, 구형 카테고리1 케이블 써도 괜찮습니다.

단자가 금도금이냐 은도금이냐 구리냐 알미늄이냐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겨우 몇cm 길이의 단자는 아무것으로나 되어 있어도 신호저하 없습니다.

-------- 잡담 ---------

케이블 업자들이 3D 케이블이라고해서 비싸게 팔아먹을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헛점을 노린것입니다. 허위 광고는 아니니까요. "허위는 아니다"와 "옳바른 것이다"는 다른 뜻입니다. 

5미터 이내의 케이블을 카테고리2로 만들어 놓은 다음에, 금도금 단자 붙여놓고 3D 케이블이라고 비싸게 파는 것이겠죠.

저는 결혼정보회사를 운영하는데요.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스타일에 대한 모아둔 자료를 올려 봅니다.

참고가 되셨으면 합니다^^

 네. 여자가 바라는 남자는 매너있고, 성실하면서 약간 나쁜 남자를 좋아합니다.  성실하게 대해주면 , 점점

정이 들어 갑니다.  저도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제가 그녀한테 잘해주고 그랫는데, 그녀가 저를 좋아하는걸

 알게되어서 지금 잘살고 있어요 ㅎㅎ 예쁜 여자일수록 약간 나쁜 여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 여친 같은경우도 그렇조 ㅎㅎ 잘나가기도 해요. 머리스타일은 짧은 편을 대도록 좋아하지만 머랄까, 리더쉽, 카리스마,같은 외모를 원하신다면 머리를 길르고 앞머리를 비대칭으로 하면 효과가 있습니다. 저도 비대칭이고, 긴머리에요. 매직은 해두는 것으 좋습니다. 저는 자연 매직 ㅎㅎ 어쨋든 결론은 매너, 성실, 잘생긴외모, 공부실력,

쌈 등등 한 3가지만 있어도 반할확률이 높습니다.!! 행복하세요!!

“당신이 끌리는 남자는 어떤 타입입니까?”라는 진문에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하겠습니까?
 
FAnet 앙케이트에서 645명의 여성이 자유롭게 쓴 코멘트를 토대로 많은 여성들이 좋아하는 남자! 즉, 경쟁률이 높은 “끌리는 멋진 남자”는 어떤 타입인지 알아보았습니다.

○ 역시 자상한 남자가 최고! ●

“자상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는, 낙천적인 남자”(25세)

“누구에게나 인기가 있고, 누구에게나 자상한 사람”(23세)

연령에 관계없이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은 “자상한 사람”, “관대한 사람”, “성격이 온화한 사람” 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이것도 자신에게만 자상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관대한 사람입니다.

● 튀지는 않지만 자심감이 있는 사람 ○

“스스로 자신감이 있고,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존경할 수 있는 사람”(28세)

“중요한 때에 자신의 의견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쿨한 사람”(25세)

보통 때는 별로 튀지 않더라도 중요한 시점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확실하게 말하여 주변을 리드할 수 있는 남자, 이런 남자다움에 여자들의 마음이 끌려간답니다.

○ 머리가 좋은 사람 ●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있지만, 지금까지 좋아했던 사람을 떠올려 보면 머리가 좋고, 열심히 하는 사람을 좋아했던 것 같군요!”(29세)

머리가 좋은 사람을 좋아하는 포인트는 하나! 단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의 회전이 빠른 사람, 유모어 센스가 있는 사람, 사회적인 지식이나 상식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부에서는 “고학력이나 고급스런 지적인 직업을 가진 머리가 좋은 사람에게는 약해진다.”(30세)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 정직한 남자 ○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 “성실한 사람”, “정직하고 착실한 사람”이라는 대답도 “자상한 사람”, “자신감이 있는 사람”, “머리가 좋은 사람”의 다음으로 눈에 띄었습니다.


 

“옛날, 적당히 거짓말만 하는 사람과 사귀어 상처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이 점은 확실하게 체크하고 있습니다.”(27세)라는 사람은 예외라고 하더라도, 대다수의 여성은 남성적인 매력이 있어도 인간적으로 건실하지 않으면 좋아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 청결하고 깨끗한 남자 ●

마지막으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이 겉모습. 겉모습에 관해 언급한 사람은, 전체의 40%나 있었습니다. (예:“뚱뚱한 사람은 예외”, “지적이고 청결한 사람”, “밝고 멋있는 사람” 등). 단 와일드한 남자다운 외모(“수염이 좋다”, “피부가 검은 사람”)를 원하는 사람은 아주 적었습니다.


 

 “손이 깨끗한 사람”, “피부가 좋은 사람”, “키가 작아도 귀여운 사람” 등의 청결감과 섬세한 겉모습을 좋아하는 여성이 많은 것이 결과로 나타났습니다.(키가 크고 작음은 조건으로 하는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즉, “꽃미남이 아니더라도 섬세하지 못하고 불결한 사람은 대상 외!”라는 것이 대부분의 여성들의 결론입니다.

 

여자들의 속성

여자들은 이런 속성을 갖고 있다. 잘 참고하여 결혼에 이르기까지 그대의 앞길에 광명이 비추길 바란다.

-남자가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있으면 바람둥이라고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더벅머리를 하고 있으면 촌놈이라고 생각한다. à그러니까 바른 듯 안 바른 듯 정돈된 머리를 유지한다.

-남자가 정장을 빼입고 나오면 어설프다고 생각하고, 캐주얼을 입고 나오면 성의가 없다고 생각하다.-->그러니까 세미정장, 멋낸 듯 안 낸 듯 자연스러운 패션 감각을 연출한다.

-남자가 여자를 칭찬하면 입에 발린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칭찬을 하지 않으면 매저가 없다고 생각한다. à그러니까 적절한 당근과 채찍질이 필요하다.

-남자가 ‘사랑한다’고 쉽게 말하면 경험자로 생각하고, ‘사랑한다’는 망을 안 하면 팔푼이로 취급한다.à그러니까 적절한 때를 골라 아껴서 사용하라.

-남자가 여자를 자주 찾아오면 지겹다고 생각하고, 자주 찾아오지 않으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한다.à그러니까 연락은 자주하되, 자주 찾아가진 말아라.

-남자가 말이 없으면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고, 말이 많으면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들어 주지 않는다고 짜증을 낸다.à가끔씩 맞장구를 쳐주는 정도가 적당하다.

-남자가 너무 바른말만 하면 쫀쫀하고 까탈스럽다고 생각하고, 반박을 전혀 하지 않으면 잘 속아 넘어가는 바보로 안다.à반박할 수 있는 것의 반만 반박하라.

-남자가 자기 어머니 애기를 하면 마마보이라고 생각하고, 아버지 얘기를 하면 덜 떨어진 녀석이라고 생각한다.à집안 얘기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남자가 약속 시간에 늦으면 정신 나간 놈이라고 생각하고, 약속 시간 전에 나오면 한심스럽게 생각한다.à그러니까 약속시간은 10분 전후로 지켜라.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 1

  1. 과거/실수는 거짓말인 것을 여자가 알더라도 끝까지 부정한다.
  가. 괜찮아, 다 이해해... 그러니까 말해봐... 라는 말은 무조건 거짓말이다.
  나. 얘기하고 더 잘해주면 괜찮을꺼야... 라는 생각 말고, 얘기하지 말고 더 잘해줘라.
  다. 계속 묻는다고... 귀찮아서 "알았어, 알았어!"하고 말해주는 순간, 한번만 더 생각해라.
  라. 그래도 계속 물으면 딴 얘기로 돌려라. 그 여자도 그 얘기가 계속하고 싶은 건 아니다.
 
2. 예쁘다는 말은 아끼지 마라.
  가. 말하는데 밑천이 드는가? 돈이 없으면 말이라도 잘해야 한다.
  나. 거짓말인 거 다 알아... 라고 해도 여자는 당신이 "진짜야"라고 말해주길 기다린다.
  다. 그냥 "예뻐"보다는 구체적인 이유를 말해야 한다. "눈이 예뻐, 코가 예뻐 등"
  라. 연예인과 비교하는 것도 좋다.  "김희선보단 조금 빠지지만 이나영보단 낫지"
 
3. 약간의 왕자병도 좋다. 하지만, 여자의 공주병을 자극해야 한다는 거.
  가. 괜찮은 남자가 지나가면, 내가 쟤보단 낫지? 라고 말하는 것도 자신감있어 보인다.
  나. "친구들이 너랑 나랑 선남선녀 커플이래" 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누가 했는지도.
  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 많이 쳐다보지 않냐? 니가 이뻐서 그런가??
  라. 거짓말 하는데 밑천이 드는가? 돈이 없으면 말이라도 잘해야 한다(강조)
 
4. 사소한 것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가?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기억해라.
  가. 타고나길 무디게 태어난 것은 어쩔 수 없다. 기념일을 놓치면 정중히 사과해라.
  나. 하지만 너무 기억을 못하는 날이 이어지면 여자가 지친다는 것을 명심해라.
  다. 한 달에 한 번정도 사소한 것을 기억해 주면 감동을 줄 수 있다.
  라. 은근슬쩍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티내는 것이 좋다.
  마. "어? 그거 어떻게 알았어?"라고 하면 "평소에 미안했어. 노력하고 있어"라고 한다.
  바. 그 여자의 지친마음은 단숨에 회복되고, 당신의 자상한 면이 부각된다.

5. 가끔 심각한 얘기로 상담을 요청한다.
  가. 가장 좋은 것은 친한 친구의 삼각관계같은 것... 없나? 없으면 지어내라.
  나. "난 친한 친구라 친구 편이지만... 넌 어떻게 생각해? 너무 어렵다."고 말해라.
  다. 평소엔 남자가 리드하더라도, 여자가 자신있는 분야에 의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라. 존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마. 비록 거짓말이라도 속내를 터놓는다는 느낌으로 여자와 가까워질 수 있다.
  바. 사귀기 전에 이야기 소재가 부족할 때도 이 방법을 써먹으면 좋다.
 
6. 열심히 일하는(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 그렇지 않다고? 그러면 지어내라.
  나. 한 달 반에 한 번 정도는 말해라. "오늘은 너무 바빠서 통화할 수 없을 것 같아"
  다. 다음날 너무너무 미안한 듯이 말해라. "어제는 미안했어요"
  라. "아니에요... 무슨 일이에요?"라고 묻는 그녀에게 신나서 어제의 성취를 얘기해라.
  마. 여자는 무슨 말인지 몰라도 자신이 만나고 있는 남자의 능력을 믿게 된다.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 2

1. 여자가 투정을 부려도 화를 내지 않고 말없이 옆에 앉아 미소로 포근
하게 감싸주는 가슴이 넓은 남자.


2. 자신이 우울하고 기분이 나쁘더라도 절대로 그녀앞에서 화풀이나 내색
을 하지 않는 자제력이 강한 남자.


3. 그녀의 재미없는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게 들어 주어 여자를 기분좋게
만드는 상큼한 남자.


4. 여자가 우울해 할 때 이유를 묻기 보다는 재미있는 유머로 기분을 풀
어 주는 가슴이 따뜻한 남자.


5. 둘이 다퉜을 때 잘잘못을 따지기 보다는 먼저 여자에게 사과할 줄 아
는 포용력 있는 남자.


6. 여자의 작은 호의에도 강동하고 감사할 줄 하는 매너좋은 남자.


7. 만날때 마다 언제나 상큼하고 포근한 미소가 가슴 설레게 만드는 부드
러운 남자.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 3

1. 여자는 특별한 남자를 좋아한다

* 뭔가 베일에 쌓인 듯한 고독한 분위기 또는 신비스런 남자
* 오래된 코트 처럼 헌 구두 처럼 부드러운 남자
* 특별난 재치와 코믹으로 같이 있으면 괜히 좋은 재미있는 남자

위에서 단적인 예만 보였지만...여러분들중에는 아마
어느정도 생긴 외모하나만 가지고 허영과 자만에 빠진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정작으로 예쁜 여자를 가진 이들을 보면 대부분.독특한 개성을 가
진 남자들이죠. 여자는 포근하고 다정하면서 깜짝놀랄만한 일을 하는
그런 남자를 좋아합니다.
혼자만의 개성을 찾아 보세요.....튈수있는 그것이 있어야 함...

2.말잘하는 남자..

여러분들 그걸 아세요?
여자들은 말수가 적은 남자를 정말 싫어합니다..
여자들끼리의 얘기지만..재수내지는 귀찮은 식으로 받아들이죠..
그러면서 여자들은 겉으론 그냥 내색을 안하죠..그러다 연락을 끊기가 일
쑤...미팅에서 퇴짜를 당하면 당신은 대화에 실패한것입니다..
넘치는 재치와 박력미..(여자는 의외로 박력있는 남자를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연예인 욕이나 노래평...이런 얘기나 한다면..볼일 없죠..
우선 그녀의 화제거리를 잘 파악합니다..그리고 잘들어주세요...
그리고 아 그렇지...맞아..그래? 식으로 축켜주세요...

3.잘들어주는 남자

잘들으세요....
여자랑 얘기할때 주의점입니다.
1>그녀가 얘기할때 딴짓하거나 딴데본다면..그리고 말을 씹거나 중간에 끼
어든다면.. 당신은 볼일 없죠...
그녀가 얘기를 하면 정말 진지한 두눈으로 그녀의 두눈을 지켜보세요..
그러면 그녀는 아..이사람하고 뭔가 통한다.. 라는 착각을 유발하죠...
일딴 이렇게 되면 그녀는 당신에게 호감을 갖게 됩니다. 명심..알았죠?
아주 진지하게..그리고 시선은 그녀의 맑은 두눈에...
참,당신이 말을 할때도 그녀의 두눈을 보면서...약간의 미소를 가끔..
그러면..그녀는 당신에 두눈에 취합니다...꼭 기억해요...
2>그녀의 얘기중 기억할만한건 다기억해요..
무슨얘기인가 하면...그녀가 난 저노래 좋아한다 라든지 색깔이쁘다..
식으로 그녀의 취향을 표현할떈...꼭 기억해서..나중에..
무심코 말해보세요 저 노래 너가 좋아하는거지..나도 좋아하게 됐어..
식으로..그러면 그녀는 당신의 마음을 읽을수 있습니다...
여자들이 눈치는 빨라서.... 꼭 기억.
특별한 일들은 당연히 기억해야겠죠?
3>이름
여자는 이름이라든지 목소리가 이쁘다는 말을 들으면 한동안 신이납니다.
너 목소리 예쁘다.. , 이름이 아주 예쁜... 식으로...
여자는 그리고 무조껀 예쁘다는 말을 들으면 좋아합니다만...
분수없이 아무때나..하면 당신은 얼간이 됩니다..
그녀와의 전화통화에서 또는 둘만의 시간에서 꼭 사용하세요..
그리고 처음 만났다면 그녀의 이름을 꼭 기억 하세요....필수..외워 그자리
에서..ok?
핵심 암기사항 그녀를 부를때 당신은 야 또는 저기 를 이용합니다.
초면일 경우 더욱 그러죠..그러지말고 대담히.. 순자야 식으로 친근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세요..일딴 힘이 들지만 한번하고나면.
그녀와 당신의 어색함이 사라집니다..

4.당신은 깔끔해야한다

여자가 남자보는 순서를 말씀드리죠..
제일먼저 보는건 1 머리스타일. 2 얼굴. 3 옷입은것. 4 깔끔함... 이런순이죠
이상한건 여자는 생머리을 아주 좋아합니다..참고..
머리스타일이야...개성있게 적당히 무스를 쓰세요...지나치면 역겹다고 하
더군요... 그리고 뒤에가서는 씹어요..참..얘기 계속하죠
깔끔한 남자를 제일좋아합니다.
외모가 좀 딸리시면 아주깔끔히 하고 다니세요..여자는 더티를 싫어합니
다..<---이게 가장 중요해요...깔끔한 첫인상을 주세요 br>옷도 세련되면서도 깔끔히..씸플하게...위에 순서는 필히 외우세요

5.자랑하지마쇼..

그녀는 어떻게 되는지는 몰라도 당신 소문은 귀신 같이 알아냅니다..
당신이 잘난게 있다면 그녀는 이미 알고 있고 알게 됩니다..
근데 미리 설치느라고...잘난체에 자만에..허풍에...
절대 금물...아셨죠...여자는 자랑하는 남자는 정말 싫어합니다..
그것또 습관적인 자랑은 더더욱...그냥 너의 진실을 그녀에게
보인다면 그녀는 당신을 신뢰하게 됩니다.

6.욕하는 남자

씨*, 존나 등등 말머리에 욕을 붙이는 남자가 무척 많아요..특히 여자 앞
에서.. 여자는 날라리가 아닌이상 욕하는 남자는 일딴 접어둡니다...
절대로 욕은 하지마세요..당신을 불량하게 볼뿐입니다...

7.당신이 할일..

우선 그녀와 비슷해져야 합니다..
말투..성격..취향 까지...
예를 들어 그녀의 말투중 특이한게 있다면...간혹가다가 써 보세요..
그녀가 미소를 뛰게 됩니다..그리고 편지를 그녀가 보냈다면
그편지지랑 똑같은거라든지 비슷한걸로....
한번 해보세요..
둘이 깨지지 않을려면 서로 비슷해지면 됩니다..그러면 그녀는 당신에대해
질리거나 거리감을 갖게 되지 않아요

8.돈생기면 그녀에게 당신은 선물을하세요

남는 돈이 있다면..그녀에게 필요한게 무언지 생각해보고 꼭 선물하세요..
선물은 꽃..반지..탁상시계..등이 인기가 있죠...
또 사랑에 관한 시가 많이 있는 시집을 선물하세요.
그럼 여자가 당신에게 편지를 써줄 때 그 시집에 있는 시를 적어줄거예요

9.말이 끊기지 않게 하세요

두사람이 만나서 막상 대면하고 있을때 침묵이 계속된다면 그건
앞날이 훤하죠...당신은 우선 그녀를 재미있게 할 의무가 있습니다.
ex>처음 미팅으로 자기 소개 할때 내이름은 서태지라고..
또는 어제 울트라멘 봤써요? 난 태권도 5단..<구구단을 센다>
여자는 아주 유치한 장난에 기쁨을 느끼기도 합니다.그것이
바로 여자의 헛점이죠...시간이 재미 있써야..그녀는
다음에 당신과 만날 날을 기다립니다...
적당히 이성적으로 적당히 코믹하게..그리고 대화는 혼자하기 보다는
그녀와 같이..우정은 일을 같이 할때 커지는 법..ok?
말을 하면서 몸짓 표정도 더불어서..해보세요...그리고 너는 어때?
식으로...같이 대화하세요..꼭.

10.깜짝

비오는 날 그녀에게 전화를 하세요
순자니? 그래 나 태지야.. 왠일이야 비오잖아..밖에..
여자는 뜻밖에 낭만엔 푹 빠져 버리죠...당신의 낭만을 이해하게 됩니다.
아주 뜻밖의 일을 벌여보세요..그녀의 기억속에 당신은 자리 잡게 됩니다.
여자는 밥사주면 좋아합니다.
여자만나면 대부분 레스토랑 가기도하죠..(돈은돈대로 깨지도..재대로 안돼
고..)또는 페스트푸드점...(너무 흔해..)
이런 곳보단 자신이 먹고 싶은곳으로 데려가세여...라면이 먹고싶으면 그냥
편의점으로 가세요.그리고 그녀에게도 라면을 하나 사주세여...
가끔 그녀를 강제적(?)으로 데리고 가서 저녁 먹었냐고 물어봐서 안먹었다
면..저녁밥 사주세요..그녀는 왠지모를 감정에 쌓입니다..
*참고로 햄버거나 식사시에 입에 뭐묻으면 그걸 바로바로 딲는 내숭.들이
있어요...하~이 사람아..그게 바로 추태...
한번에 먹고 나중에 딲도록하세요...쪽? 전혀..여자는 그걸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죠..대담하게 보입니다..꼭 하세요..
나중에 편해집니다..자기 표현이라서 개성이고..

11.걸을때..

길을 걸을땐 내가 차도쪽 그녀가 인도쪽으로..---->매너
그리고 그녀를 내옆에 두고 반드시
그리고 자연스런 skin ship도 괞찬아요..손을 잡는 정도...
보통 쑥쓰러워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인간이 있죠...

12.여자를 볼땐

여자를 여자로 보지말고 남자로 생각하고 여자를 대해 보세요
이것이 쑥스러움 해결책이고..자연스러움을 만들어내죠...
반드시 기억하기를..

13. 서둘르지마세요

여자만나서 깨지는 이유중의 가장 큰 이유는 설치는데 있죠..
너무 성급하게 서둘르죠..
남자는 여자가 조금만 웃어주고 잘해주면 마치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착
각하는게 대부분입니다.그래서 너무 서두릅니다..
이에 비해 여자는 느긋하죠...전혀 서둘지 않죠...
그러나 남자가 너무 서두르면 당연히 부담감내지는 재수 없어 보이죠..정말...
그래서 둘은 영영 끝나죠..절대 서두르지마세요...
여자가 사랑한다는 말또는 표현을 하기전에는....
명심...
*여자는 정말 좋아하는 사람앞에선 함부로 말이나 행동을 안합니다..
만일 당신 여자가 당신 앞에서 쾌활하다거나 남자처럼 부담 없다면
그녀는 당신을 그저 친구정도로 생각합니다

14. 지적인 남자..

여자들이 오빠를 좋아하는 이유의 원인은 대부분 지적 성숙때문..
남자의 지적 수준이 좋아서죠..같은 나이는 자기 보다아래라고
생각합니다.우월감이 좋겠다....
그러므로 당신은 성숙해야한다...
알았죠?
비전이 있는남자....

15.여자는 연이다...

여자는 연이다..
아세요? 여자는 연과 같아서 당기고 풀고를 잘해야죠...
너무 자주만나면 질리죠...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잘 조절하세요..
명심해요...가끔씩 적당한 거리.. 의외로 반응이 흥미롭죠...
남자가 푼수처럼 자주 전화하거나 만나면 그게 뭐아...

16.여자는 여운에 약하다.....

다음약속을 할때는 반드시 이렇게 하세요..
우리 다음주 일요일에 만나자 11일에 만나자
식은 구닥다리..70년대 가리봉 데이트 수법..
내가 나중에 연락할께.. 하고 말하세요..
그녀는 여운을 느끼고..반드시 그녀는 당신의 전화를 기다립니다
그러면서 당신을 당연히 생각하고....아마 사랑할꺼야..

17.편지쓸때 유치한짓하지마요

이렇게 별이 빛나고.. 내그리움에 파도가~~~~ 식의 편지는
모두 말장난이지...이건 너무 유치한 편지 입니다
나중에 느끼시겠지만..이런편지는 감정적으로 쓴거라서..아침에 일어나서
읽어보면
너무 유치해서 쪽팔릴것이라고 확신한다...
편지 쓸떈..남자답게 강하고 직선적인 멋이 풍기는..그자체를..
너무 수식어를 쓰지마세요..
밤에 편지쓸땐 감정을 자제..이성에 맞기도록...

18.돈계산은 각자

여러분은 갑부가 아니야
여자 사귀게 되면 으례 돈걱정나지?
친구야...더치페이를 해라..다소어색하겠지만..반드시
자연스럽게 유도 할수 있도록....

19.데이트 장소

이게 가장 중요하죠?
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곳은 음...제 경험으로 미뤄 보면 공원,극장...등
이 좋아요.
특히 극장같은 곳에선 skin ship을 하기 쉬워요..
그렇다고 너무 적극적이면 여자가 싫어하죠..적당히..예를 들면 손을 잡는
다든가...어깨에 손을 올린다던가...
또 skin ship을 하기 쉬운 영화는 공포 영화가 가장 좋아요...
공포를 볼 때 손을 잡아주면 여자들은 안심한다고해요...
그리고 공원은 얘기하기 좋은 곳이죠...그 곳에서도 분위기만 잘 잡히면 어
느정도의 skin ship이 가능해요...

20.정...

여자는 정에 약합니다...
여자와 정을 들이세요...

21.주의할 점!!!

될 수 있느한 여자가 당신을 많이 생각하게 하세요...
당신을 못보면 미칠정도로...
이 방법들을 다 써보세요 그럼 가능 합니다...
그리고 가끔씩은 울리세요...기쁘게 해서...때려서 울리면 안되요!!
그리고 서로 사랑하게 되면 그녀만 사랑해주세요...



경찰 학살자 양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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