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한국과 인연을 맺고 살아온 외국인들의 뒷담화… “영어 교육에 대한 과도한 투자는 사회적 낭비”

▣ 사회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정리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 참가자

로버트 쾰러(34·미국인) <서울 셀렉션> 편집장

강미노(32·독일인) 서울대 정치학과 박사과정

장기(31·중국인) 경희대 중국어학과 전임강사

스나미 게스케(29·일본인) 프리랜서 기자(전 <에히메 신문> 기자)

영어는 한국인의 가장 큰 트라우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영어 공교육 혁신 방안을 꺼내든 뒤 온 나라는 말 그대로 ‘벌집’이 됐다. 도하 신문과 방송들은 교사와 학생들의 반응에서부터 영어 사교육 시장의 변화 전망에 이르는 다양한 기사들을 쏟아냈고, 초·중생 아이를 둔 부모들은 ‘이제 우리 애는 어쩌면 좋나’ 걱정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영어 열풍은 외국인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한국과 인연을 맺으며 살고 있는 미국·일본·증국·독일인이 모여 우리 사회의 영어 열풍에 대한 뒷담화를 쏟아냈다.

중국도 문법에서 회화 위주로

사회: 모두 한국말을 잘한다. 한국과 인연을 맺은 계기는.

스나미 게스케(이하 스나미): 한국어는 일본에서 자이니치(재일동포) 친구에게 1년 정도 배웠다. 에히메현 마쓰야마시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평택 미군기지 문제를 취재하고 싶어서 2006년 여름에 그만뒀다.

로버트 쾰러(이하 쾰러): 1997년에 영어 강사로 한국에 왔다. 오기 전에 한 달 동안 책으로 독학을 했다. 처음 자리잡은 곳은 경북 문경이었는데, 시골이어서 영어 잘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어학당은 돈이 없어서 못 다녔고(웃음),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혼자 배웠다.

강미노(이하 강): 1994년에 한국으로 치면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졸업을 앞두고 6주 동안 배낭여행을 했다. 1997년에 다시 한국에 와서 연세어학당에서 1년 동안 한국어를 공부했다. 서울에서 1~2년 동안 회사도 다녔고, 지금은 서울대 정치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는 중이다.

장기(이하 장): 1996년에 점수 맞춰서 한국어과에 들어갔다. (웃음) 그때만 해도 중국에서 한국어는 인기 언어가 아니었다. 한국 영사관에서 일하다가 한국인 남편을 만나 2001년 한국에 들어왔다. 지금은 경희대에서 학생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친다.

사회: 한국 사람들은 외국에서는 영어 교육을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하는데.

스나미: 일본도 한국과 비슷하게 문법 위주로 가르쳐 듣기나 말하기 능력이 부족하다. 영어가 입시에 예속돼 실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장: 중국어는 영어와 발음이나 어순이 비슷하다. 한국인이 잘 못하는 ‘f’ ‘th’ 등의 발음이 중국어에는 있다. 주어 뒤에 동사가 먼저 오고 목적어가 오는 등 어순도 비슷하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한국인보다 영어를 더 쉽게 배우는 것 같다. 교육제도는 한국과 비슷하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배웠는데 2006년부터 초등학교 3학년부터 가르친다. 문법 위주에서 회화를 중요시하는 쪽으로 교육 프로그램이 변하고 있다.

강: 독일은 주마다 교육제도가 다르다. 독일은 한국과 학년체계가 달라 13학년까지 있다. 내가 다닐 때는 5학년부터 11학년까지는 의무로 배우고 13학년까지는 배우고 싶은 사람만 배웠다. 독일도 요즘은 영어를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있어서 몇몇 주에서는 2004년부터 3학년 때부터 영어를 가르친다.

쾰러: 미국인과 영국인은 전세계적으로 외국어를 못 배우는 것으로 유명하다. (웃음) 내가 초등학교 때 배운 말은 이탈리아어였는데, 지금은 다 잊었다. (웃음) 대학 때는 아프리카 동부에서 쓰는 스와힐리어를 배웠다. 나는 조지타운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는데 졸업하려면 외국어를 한 가지씩 익혀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영어를 잘하면 취직도 잘한다?

사회: 한국의 영어 열풍에 대한 느낌은.

강: 독일에서도 영어는 중요하고 영어를 잘하면 취직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대학 입시에는 영어 능력시험이 없다. 한국은 모든 곳에서 영어가 ‘의무’가 되는 분위기인데, 독일은 전혀 그렇지 않다.

스나미: 사실 일본과 한국은 비슷한 느낌이다. 영어 공부는 입시나 취직을 위한 것이다. 그런 교육이라 사람들이 영어를 정말 싫어한다. 일본에는 ‘영어 알레르기’라는 말이 있다. 자꾸 학생들에게 영어를 강요하니까 애들이 영어가 싫어서 대입을 포기하기도 한다.

장: 중국도 한국과 비슷하지만 사교육 열풍은 덜한 편이다. 그래도 중국에도 신동방이라는 큰 영어학원이 있고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기 위해 베이징으로 몰려든다.

쾰러: 미국에는 사교육이라는 개념이 없다. 미국 교육제도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열심히 놀면서 사회활동을 하고, 대학 들어가서 공부하라는 것이다. 미국 고등학생들은 매일 놀기만 하고 범죄를 저지르니까 무조건 미국 제도가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강: 한국에서는 왜 그렇게 영어에 목을 매는가?

사회: 간단하다. 영어를 잘하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에 가며, 이다음에 좋은 회사에 취직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쾰러: 영어에 대한 한국 사회의 분위기는 좀 미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영어를 잘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취직도 잘한다고 하는데 그게 꼭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제도적인 문제가 있는데, 영어를 잘한다면 외국으로 유학 갔다 왔거나 돈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지 않나. 이 세상에서 한국만큼 외국어 교육에 신경쓰는 나라가 있는지 모르겠다.

강: 이명박 당선자 쪽에서 철회하긴 했지만 모든 교과목을 영어로 가르친다는 생각도 황당하다. 독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말 지키기 차원이 아니라 그렇게 가르치는 게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은 인간이 자기 정체성을 찾는 단계다. 이렇게 중요한 과정에서 필요한 정보나 경험들을 모국어로 배우지 못하면 매우 혼란스러울 것 같다.

장: 몰입 교육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사용하는 캐나다의 특수한 상황에서 시작된 것인데, 그런 제도를 갑작스럽게 도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쾰러: 그렇지만 영어 수업을 영어로 한다는 생각에는 찬성이다.

스나미: 일본 학교에서도 그렇게 하면 좋겠지만, 영어를 그냥 일본어로 가르친다. 영어 수업을 영어로 할 수 있는 선생님이 많지 않다.

강: 독일에서도 영어는 영어로 가르친다. 그게 당연하다.

국가 경쟁력, 전체주의적 느낌

사회: 이 당선자 쪽에서 영어 교육을 강조하는 논리로 내세우는 것은 국제 경쟁력 강화다.

쾰러: ‘영어가 국제 경쟁력이다’라는 개념은 아예 틀린 것이다. 대학 때 아프리카어를 전공해서 아프리카에 갔다. 아프리카에 영어 잘하는 나라가 정말 많다. 내가 있던 곳은 탄자니아였는데, 그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50달러 수준이었다. 케냐와 우간다도 영어를 잘한다. 이에 견줘 영어를 못하는 일본은 잘산다. 단순히 영어를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그 나라의 경쟁력을 결정지을 수 없다.

강: 그런 생각은 이 당선자의 착각이다. 영어를 배우는 게 국익을 위해서, 경제를 위해서라고 하는데 완전히 시장주의와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에 빠져 있다. 그 사람들은 교육이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이야말로 이 당선자의 이념이다.

쾰러: 사실 영어를 잘하는 게 시장 논리라고 하는데 그 말도 틀리다. 영어를 잘하는 것이 시장의 요구라면 한국 사람들은 벌써 영어를 잘하게 됐어야 한다. 그런데 못한다. 영어를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안 쓰니까 그렇다. 그럼 왜 안 쓰나. 한국에서는 굳이 영어를 쓸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당연히 못하는 거다.

스나미: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그 이유가 ‘미국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든지 ‘영어가 재미 있으니까’였으면 좋겠다. ‘국가 경쟁력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런 생각은 국가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느낌이 난다. 하고 싶은 애들에게는 잘 가르치고, 싫다는 애들에게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 영어와 한국어 두 가지 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으면 좋은데, 역시 중요한 것은 모국어다. 같은 말도 한국어로 들었을 때와 영어로 들었을 때의 느낌이 다르다. 지금 한국 상황을 보면, 어릴 때부터 외국에 나가서 영어는 잘하는데 한국어는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한국어 공부를 따로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렇게 모국어도 대충대충, 영어도 대충대충 배우며 자라면 다음에 커서 한국과 세계를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사회: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영어를 배우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쾰러: 그것도 틀린 얘기다. 한국에 오는 관광객을 국적별로 따져보면 1위는 일본, 2위는 중국이다.

사회: 한국인은 외국인 하면 유럽과 미국의 백인을 떠올린다. (웃음)

쾰러: 영어는 어차피 도구일 뿐인데, 왜 그렇게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내 친구 하나는 문경시 공무원이었다. 승진 시험을 위해 영어를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왜 시골 공무원이 그렇게 영어를 공부해야 하나. 사회적인 낭비다. 그런 노력을 좀더 생산적인 분야에 쏟아부어야 한다.

‘영어 못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사회: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도 계속 영어에 목을 맬 것이다. 한국 영어 교육에 조언을 해준다면.

강: 한 교실에 30~40명씩 앉혀놓고 언어를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독일에서는 많으면 20명이다. 영어와 한국어는 많이 다르다. 한국 학생이 독일 학생과 같은 속도로 영어를 배울 순 없다. 그 점을 인정하자.

쾰러: 영어 스트레스 받지 말고, 신경쓰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그렇게는 말 못하겠다. 앞으로도 스트레스 많이 받고 신경 많이 쓸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 태도를 좀 고쳐야 한다. 한국 사람들이 ‘영어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자원을 영어에 투자하기 전에 그만한 경제성이 있는지 따져봤으면 한다. 교재 바꾸고 하려면 돈이 많이 들 텐데 이게 다 국민 혈세다.

장: ‘영어 잘했으면 좋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목표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어의 중요성도 강조했으면 좋겠다. 난 한국어를 외국어로 배웠다. 한국의 시나 노래 가사를 들으면 똑같은 중국어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느낌들이 있다. 그런 언어를 가졌다는 점에 대해 한국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스나미: 한국은 모든 가치가 획일적이다. 문화는 일본과 비슷하지만 그런 점은 좀 다르다. 사람이 성공하는 데 공부가 전부는 아니다. 영어를 못해도 좋다, 대학교 안 가도 괜찮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회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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