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사회에 대하여


소비사회란?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것 이상으로 소비가 이루어지는 사회. 주로 고도로 발달한 산업화 사회에서 볼 수 있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가 이루어지는 현대 사회

 

*대중문화가 학문적으로 큰 관심을 끌지 못했던 이유 : 소비에 대한 관심이 학계에서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 소비를 통한 의미 생산, 소비의 생산성 등에 관한 논의들이 활발해지면서 대중 문화에 대한 관심도 증대됨

 

소비와 상품의 논리
 소비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상품의 논리가 일반화되어 노동과정이나 물질적 생산품뿐만 아니라 문화, 섹슈얼리티, 인간관계, 심지어 환상과 개인적 욕망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모든 것이 이 논리에 종속되어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모든 기능과 욕구가 이윤에 의해 대상화되고 조작된다고 하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진열되어 구경거리가 된다는, 즉 이미지, 기호, 소비 가능한 모델로 환기되고 유발되고 편성된다는 보다 깊은 의미에서이다.
 

소비와 기호
 '소비 과정은 기호를 흡수하고 기호에 의해 흡수되는 과정이다.'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기호의 발신과 수신만이 있을 뿐이며 개인으로서의 존재는 기호의 조작과 계산속에서 소멸한다. 소비시대의 인간은 자기 노동의 생산물뿐만 아니라 자기 욕구조차도 직시하는 일이 없으며 자신의 모습과 마주 대하는 일도 없다. 그는 자신이 늘어놓은 기호들 속에 내재할 뿐이다. 초월성도 궁극성도 목적성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이 사회의 특징은 '반성'의 부재, 자신에 대한 시각의 부재이다. 현대의 질서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는 장소였던 거울은 사라지고, 대신 쇼윈도만이 존재한다. 거기에서 개인은 자신을 비춰보는 것이 아니라 대량의 기호화된 사물을 응시할 따름이며, 사회적 지위 등을 의미하는 기호의 질서 속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소비의 주체는 기호의 질서이다.

 

*소비와 육체
 소비의 가장 아름다운 대상은 육체이다. 오늘날 육체는 광고, 패션, 대중문화 등 모든 곳에 범람하고 있다. 육체를 둘러싼 위생, 영양, 의료와 관련한 숭배의식, 젊음, 우아함, 남자다움 혹은 여자다움에 대한 강박관념, 미용, 건강, 날씬함을 위한 식이요법, 이것들 모두는 육체가 구원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육체는 영혼이 담당했던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문자 그대로 넘겨받았다. 오늘날 육체는 주체의 자율적인 목적에 따라서가 아니라, 소비사회의 규범인 향락과 쾌락주의적 이윤창출의 원리에 따라서 다시금 만들어진다. 이제 육체는 관리의 대상이 된다. 육체는 투자를 위한 자산처럼 다루어지고, 사회적 지위를 표시하는 여러 기호 중의 하나로서 조작된다.

 

소비와 개인의 자유, 상품화
 사람들은 소비재 상품으로 인해 오래되고 비교적 안전하지만 폐쇄적인 공동체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역동적인 대중 사회의 표현적인 개인주의로 진입했다. 상품은 사람들에게 자유감을 주었다. 생산되는 제품의 맛과 느낌, 안락함은 육체적 만족을 극대화시키고 즐거움과 흥분의 강화를 위해 고안되었고, 개인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낳았다. 소비주의의 맥락에서 보면, 자유란 공공 담론이나 자유로운 표현에 참여하는 추상적인 권리가 아니다. 자유란 상품 속에서, 상품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고 개인적 즐거움을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급자족 시대가 아닌 이상 모든 사람은 타인이 만든 재화와 서비스를 소비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즉 현대 사회의 소비는 모두 상품 소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상품화라는 현상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자신이 직접 쓰기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은 상품이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 : 사회사상은 초월의 정신을 망각한 현대 소비사회의 정신부재의 경박성을 슬퍼하면서, 그런 삶의 경박성의 원인이 바로 소비사회의 자본적 본질인 모든 것의 기호화(signalization)에 있다. 전통 사회에서 물건은 어떤 가치에 대응했었다. 사용가치든 교환가치든 물건은 인간의 구체적 욕망의 충족을 만족시켜 주었다. 집은 어떤 정신적이고 내면적 가치를 가족에게 주었었다. 그러나 이제 집은 단지 상상적인 상품의 기호적 가치만을 지시해서 헌 물건을 버리고 새로 사듯이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기의 소비품목에 불과하다. TV프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앉아서 리모컨으로 쉽게 손가락 끝으로 바꾸듯, 모든 것은 소비자의 순간적 변덕에 따라 움직이는 기호와 같은 '환영(幻影=simulacrum)에 불과하다. 고도소비사회에서 자동차도 기능가치로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유행이나 삶의 스타일이나 허세나 으쓱대고 싶은 욕망의 환영을 만족시켜 주는 일시적 대용물일 뿐이다. 그런 욕망의 환영은 마치 옛 사회주의 소련의 한 청년이 서방 자본주의의 대명사 같은 블루진을 입고 다니거나, 아프리카 부시맨의 어떤 사나이가 비행기에서 떨어진 서방 콜라병을 무슨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싶어하는 그런 환영과 유사하다 하겠다. 중요한 것은 블루진이나 콜라병이 그 자체로서 의미를 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차이의 기호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소비사회에서 모든 이들은 다른 이들과 다른 어떤 기호의 환영을 소비하고 싶어한다. 마르크스가 비판한 자본주의의 본질은 노동과 정신적 가치 등 모든 것이 다 시장의 교환가치로 전환되어 상품화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마르크스의 비판이론은 이미 지나간 시절의 가치유물에 불과하고, 이제 사회는 모든 것이 기호적 교환과 같은 '흉내내기'(simulation)의 차원으로 전락하여 실재적 가치가 다 사라졌다는 것이다. 모든 흉내내기의 환영은 소비사회가 부추긴 차이화의 조작 코드에 인간이 멋모르고 덩달아 춤추는 껍데기에 불과함을 연상시킨다. 차이화 코드는 소비사회가 소비자를 유혹하는 차별화 기호의 놀이에 해당한다. 그래야만 소비자가 차이의 환영 속에서 각각 섹시해지기 위해 돈을 마구 쓴다. 섹시하다는 것은 소비시장에서 상품으로 잘 전달되기 위하여 남들을 유혹하는 기호고, 각자는 대중사회에서 차이를 표시하기 위하여 과감히 더 섹시하게 튀어 보이게끔 스스로를 기호화한다. 모든 이는 다 섹시한 차이를 연출하기 위해 환영을 좇는다.

 

보드리야르의 '흉내내기' : 모든 것이 영상으로 비쳐진다. 브라운관이나 컴퓨터의 화면, 유리처럼 투명하나 절연체와 같은 차가운 매체의 통로를 통하여 세상을 구경하거나, 백화점의 상품을 훑어본다. 충격적인 자동차 사고를 목격하고도 자동차 유리를 통하여 감정이 절연된 상태에서 구경하는 정도의 감정만 사람들이 갖는다. 서로 관여하는 진실이 우러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금방 지나가는 일시적 참상에 불과하고, 먼 나라에서 전쟁이 터져도 그 것은 TV화면의 순간적 그림으로 보는 환영일 뿐이다. 사람들이 지하철에 우글거리나 그들이 사람들이라고 여겨지기보다 오히려 사람들의 환영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냥 사람 비슷한 환영들이 득실거릴 뿐이다. 아무도 대중을 사람들의 실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는 현실을 실제로 느끼지 않고, 차가운 기호로 대체되어 실제로 느낀 척 흉내낼 뿐이다.

 

출전 :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 게리 크로스, <모든 것을 소비하는 세기 : 현대 미국에서 왜 소비주의가 승리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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