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혜 철학자
잠을 이룰 수 없는 불멸의 시간들이 있다. 정체된 시간의 그물 속에 갇혀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단지 '내가 있다'라는 존재의 구멍 속에 함몰되어 의미의 출구를 찾지 못하는 순간들. 이때 난 시인 이상이 쓴 <권태>라는 산문을 떠올린다. 권태라는 감정이 지닌 정체는 무엇인가. 삶에 대한 의미 부여를 할 수 없는 정체된 시간 속에 함몰된 자기 존재에 대한 잉여감정인가. 그 시간은 얼마나 거기서 탈출하여 의미 있는 삶을 향해 날개를 달고 싶어 했는가. 누구도 건강하게 살기 원한다면 아마도 이러한 상황에 함몰되어 있기보다는 탈출하길 원한다. 우리의 삶의 핵심은 지속적인 흐름을 위한 의미 부여이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청명한 아침햇살을 타고 밖을 나선다. 가벼운 느김이다. 나를 에워싼 세상의 소재들, 세상은 마치 오늘 지금 나의 향유를 위해 마련된 지상의 양식들이다. 하지만 내일의 불안이 고개를 내민다. 나는 오늘만을 위해 살 수 없다. 오늘의 행복은 내일의 걱정로 이어지고, 그 걱정은 내일을 위한 노동과 소유를 요구한다. 노동의 대가로서의 소유가 내일을 위한 삶의 지속을 보장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늘의 향유와 내일을 위한 노동과 소유, 이는 지속적인 흐름을 위한 근원적인 자기보전의 방식인 것이다. 자신을 위한 삶의 우너초적인 의미 부여인 것이다. 향유와 노동을 통한 지속적인 삶의 흐름 속에서 여전히 고개를 드는 내 존재의 균열, 이에 대한 불안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오늘의 향유와 노동과 그 대가로서의 소유가 삶의 진정한 의미를 보장할 수 잇는가. 우리는 매일 내 미래에 닥칠 죽음에 대한 불안을 유보하며 살고 있다. 자기보존이라는 삶의 의미가 나의 죽음을 통해 끝난다면. 그 삶조차 무의미하지 않은가.
내 미래에 닥칠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이따금 자기 회귀의 종말로서의 죽음이 아닌, 그 죽음을 초극한 가치 있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인간의 자기보전을 위한 삶의 종말이 죽음이라면, 극한의 가치 잇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인간의 자기보전을 위한 삶의 종말이 죽음이라면 자기 보전을 뛰어넘는 가치 잇는 삶은 어디에 잇는 것일까?
여기서 나는 가치 있는 삶과 타인의 존재를 생각해본다. 타인의 존재는 내 삶의 의미, 윤리적 근거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타인은 단지 내 향유와 노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나의 경쟁자인가. 내 삶의 경쟁자가 아닌 사랑과 존경의 대상으로서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타인의 어떠한 모습으로 내게 전해오는가. 향유와 노동을 통한 자신만의 삶을 질책하면서 타인과의 결속을 부르짖는 목소리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여기서 어느 철학자가 한 말이 생각난다. " 삶의 의미는 이 세상 안에 잇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밖에서 온다고." 이 세상 밖 저 높은 곳에서 보편적 인간성에 근거하여 타인과의 결속을 명령하는 분은 누구인가. 그 분은 마음속에서 일종의 이념으로서 길거리에 버려진 고아의 모습, 일그러진 나환자의 모습, 외롭게 죽어가는 무의탁 노인의 모습에서 보편적 인간성을 밝혀주며 나의 이기심을 질책하는 것이다. 그분은 불안과 위협,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나의 이기심과 동정의 대상이 아닌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염려와 사랑에 대한 의무로서 내 삶의 중심으로 올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무한한 책임과 의무, 이를 근거로 한 사랑으로 내 존재의 의미는 타인을 통한 역사의 진행 속에서 이어질 수 잇다고 생각해본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과연 인간 삶의 구체적 체험이 아닌 단지 이념에 불과한 것일까. 이 때나는 문득 타자와 타자의 결합인 남녀의 사랑을 통해 체험되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아이는 타자와의 사랑을 통해 체험된, 미래를 향하여 내 삶의 의미가 부여된 새로운 타자이다. 아이를 통해 이기적인 사랑의 운동은 정지하고 내 존재의 중심은 타자 속으로 무한한 책임과 의무를 통하여 이행되는 것이다. 나의 의미가 이이를 통해 구체적으로 체험되고 그 아이의 아이에 대한 사랑을 통해 지속된다면 유한한 시간성은 미래를 향하여 더욱더 젊어지고 영원히 푸르러질 수 있지 않을까? 월간에세이 1997년 2월호
잠을 이룰 수 없는 불멸의 시간들이 있다. 정체된 시간의 그물 속에 갇혀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단지 '내가 있다'라는 존재의 구멍 속에 함몰되어 의미의 출구를 찾지 못하는 순간들. 이때 난 시인 이상이 쓴 <권태>라는 산문을 떠올린다. 권태라는 감정이 지닌 정체는 무엇인가. 삶에 대한 의미 부여를 할 수 없는 정체된 시간 속에 함몰된 자기 존재에 대한 잉여감정인가. 그 시간은 얼마나 거기서 탈출하여 의미 있는 삶을 향해 날개를 달고 싶어 했는가. 누구도 건강하게 살기 원한다면 아마도 이러한 상황에 함몰되어 있기보다는 탈출하길 원한다. 우리의 삶의 핵심은 지속적인 흐름을 위한 의미 부여이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청명한 아침햇살을 타고 밖을 나선다. 가벼운 느김이다. 나를 에워싼 세상의 소재들, 세상은 마치 오늘 지금 나의 향유를 위해 마련된 지상의 양식들이다. 하지만 내일의 불안이 고개를 내민다. 나는 오늘만을 위해 살 수 없다. 오늘의 행복은 내일의 걱정로 이어지고, 그 걱정은 내일을 위한 노동과 소유를 요구한다. 노동의 대가로서의 소유가 내일을 위한 삶의 지속을 보장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늘의 향유와 내일을 위한 노동과 소유, 이는 지속적인 흐름을 위한 근원적인 자기보전의 방식인 것이다. 자신을 위한 삶의 우너초적인 의미 부여인 것이다. 향유와 노동을 통한 지속적인 삶의 흐름 속에서 여전히 고개를 드는 내 존재의 균열, 이에 대한 불안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오늘의 향유와 노동과 그 대가로서의 소유가 삶의 진정한 의미를 보장할 수 잇는가. 우리는 매일 내 미래에 닥칠 죽음에 대한 불안을 유보하며 살고 있다. 자기보존이라는 삶의 의미가 나의 죽음을 통해 끝난다면. 그 삶조차 무의미하지 않은가.
내 미래에 닥칠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이따금 자기 회귀의 종말로서의 죽음이 아닌, 그 죽음을 초극한 가치 있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인간의 자기보전을 위한 삶의 종말이 죽음이라면, 극한의 가치 잇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인간의 자기보전을 위한 삶의 종말이 죽음이라면 자기 보전을 뛰어넘는 가치 잇는 삶은 어디에 잇는 것일까?
여기서 나는 가치 있는 삶과 타인의 존재를 생각해본다. 타인의 존재는 내 삶의 의미, 윤리적 근거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타인은 단지 내 향유와 노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나의 경쟁자인가. 내 삶의 경쟁자가 아닌 사랑과 존경의 대상으로서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타인의 어떠한 모습으로 내게 전해오는가. 향유와 노동을 통한 자신만의 삶을 질책하면서 타인과의 결속을 부르짖는 목소리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여기서 어느 철학자가 한 말이 생각난다. " 삶의 의미는 이 세상 안에 잇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밖에서 온다고." 이 세상 밖 저 높은 곳에서 보편적 인간성에 근거하여 타인과의 결속을 명령하는 분은 누구인가. 그 분은 마음속에서 일종의 이념으로서 길거리에 버려진 고아의 모습, 일그러진 나환자의 모습, 외롭게 죽어가는 무의탁 노인의 모습에서 보편적 인간성을 밝혀주며 나의 이기심을 질책하는 것이다. 그분은 불안과 위협,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나의 이기심과 동정의 대상이 아닌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염려와 사랑에 대한 의무로서 내 삶의 중심으로 올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무한한 책임과 의무, 이를 근거로 한 사랑으로 내 존재의 의미는 타인을 통한 역사의 진행 속에서 이어질 수 잇다고 생각해본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과연 인간 삶의 구체적 체험이 아닌 단지 이념에 불과한 것일까. 이 때나는 문득 타자와 타자의 결합인 남녀의 사랑을 통해 체험되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아이는 타자와의 사랑을 통해 체험된, 미래를 향하여 내 삶의 의미가 부여된 새로운 타자이다. 아이를 통해 이기적인 사랑의 운동은 정지하고 내 존재의 중심은 타자 속으로 무한한 책임과 의무를 통하여 이행되는 것이다. 나의 의미가 이이를 통해 구체적으로 체험되고 그 아이의 아이에 대한 사랑을 통해 지속된다면 유한한 시간성은 미래를 향하여 더욱더 젊어지고 영원히 푸르러질 수 있지 않을까? 월간에세이 1997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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