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제대로된 분석이라기보단 스포츠연예 신문에서나 어울릴법한 기사로군요.
미국이 한국과의 파트너쉽을 늘리려하는 이유를 보다 심층적으로 분석해야지 한국과
학이 이만큼 성장했으니 우리모두 자랑스러워하자(?) 이런소리는 정치인들이나 해당
관계자들의 방식이지 공신력있는 언론인들의 방식이 아닙니다.
미국이 생각하는 것은 크게 두가지겠죠. 하나는 한국의 과학기술력을 이용하는
것과 다른하나는 다름아닌 중국이겠죠. 이런측면들을 들춰내야지 무슨 애국심이나
자극해서 관심이나 끌려는 행태는 여전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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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8.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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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ero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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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112.xxx.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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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국가소유나 공동소유를 주장한 적이 없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1당독재를 주장한 적이 없다.
마르크스는 현대 주식시장과 주식회사의 창시자역할을 했다.

한국인들 대다수는 이런말을 말도 안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학문적으로 이미 검증된 진실이다. 또한,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상식이 되어 있다. 케인즈가 바보가 아닌한 당신들이 알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였다면 구제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개인의 소유에 기반한 공동점유를 궁극의 사회적 소유형태로 결론내렸다.
1989년에 유럽학계에서 이미 한국인 학자가 이를 논문으로 제출하여 공인 받았다.
인문사회과학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정말 위대한 세계적 쾌거이죠...

마르크스 자본론3권에는 당시의 원시적 주식회사가 아닌, 거의 세계최초로 현대의 주식회사와 주식시장에 대한 개념과 이론이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정치에 대한 구체적 언명은 거의 없었으나, 그 얼마안되는 정치에 대한 언명중에서 독재가 아닌 쌍선적 토론정치에 기반한 법과, 정당, 국가에 대한 언명이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로, 인터넷 등에 기반한 새로운 민주주의 형태로서 직접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하는 최첨단 정치이론에서 기반으로 삼고 있는 내용이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공산당 선언의 1당독재하는 거짓말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생활이 좋아지고, 지식과 교육의 기회가 많아져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정치적 주도권을 가지는 것으로,
독재라는 말은 영국식 영어와 독일어에 대해 미국과 구소련에서 에서 잘못 해석한것이다.

한국이 세계 경제 10위 이면서 국민들의 생활수준과 복지는 후진국 수준인 이유는.
바로 이런 마르크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막았던 독재정권의
의도에 따라, 전세계 선진국들이 선진국이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간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를 빨.갱이 이론이라는 말도 안되는 누명을 씌워 거부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분배와 복지를 강조하는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를 거치지 않는한 절대로 선진국이 될 수 없다. 한국이 세계대다수의 선진국보다 아주 뛰어난 경제사상과 학문을 만들지 않는한.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정권인 노무현 정권을 좌파라고 착각하는 바보 짓거리를 보면 ...참.. 할말이 없다.

또한, 이 글에 달릴 근거제시는 없고 비방만할 무식한 댓글들을 생각하면.... 그들의 무지와 몽매가 불쌍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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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디
    bolja2
    내용
    그렇구나 근데 님은 어떤직업을 가지셨길래 그렇게 잘아시는건지
    작성일시
    11.08. 18:12
    IP
    125.184.xxx.133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그냥 평범한 엔지니어일 뿐이에요.. 다만, 마르크스에 대해서 유럽에서 제대로 배운 분한테 대학에서 강의를 듣고 공부를 했을 뿐...
    작성일시
    11.08. 18:14
    IP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yjugremrin
    내용
    liberosh// ㅎㅎㅎ 불행하게도 사이비한테서 강의를 들으셨군요. 다시한번 제대로 공부하여 보시죠. 나원참 같은이론을 저렇게 맘대로 아전인수해서 가르치다니. 이건 사기야 사기.
    작성일시
    11.08. 18:24
    IP
    211.49.xxx.119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위에 yjugremrin... 하다못해 한국에서 번역한 위의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이나... 엠에베를 편견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해도.. 저의 말이 맞다는걸 알수 있습니다. 아무 근거없이 자신의 무지몽매가 드러나자 사기라고 고함만 치는 당신이 불쌍하군요.
    작성일시
    11.08. 18:25
    IP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ishijibu
    내용
    굉장히 놀라운 견해군요. 혹시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은 읽어보신 적 있으신지??
    작성일시
    11.08. 18:25
    IP
    59.17.xxx.88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공산당선언 영국판과 불어판, 독일어 판을 모두 읽었지요.. 다만, 한국에서 알려진 미국어 번역판은 아예 가치가 없어서 읽지 않았습니다. 위에님이 읽은것은 미국어판인가요?
    작성일시
    11.08. 18:26
    IP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참.. 러시아어 판도 엉망진창 이더군요...
    작성일시
    11.08. 18:27
    IP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ishijibu
    내용
    재산권의 독재적 침해의 항목을 하나하나 열거하면 1.토지사유의 금지와 모든 토지임대료 수입의 공공목적 투자 2.엄격한 누진소득세제 실시 3. 상속권의 전면 철폐 4. 반역자와 이민자의 재산 몰수 5.국립은행의 국가자본독점운영을 통한 신용대출 제도의 국유화와 중앙집권화 6. 교통, 통신의 국유화와 중앙집중화 7.국유공장들의 확장, 황무지개간과 공동계획에 의한 토질개선 추진 8.노동의 평등의무화 산업예비군 농업예비군의 설립 9.농업과 제조업의 결합. 인구분산을 통한 도시와 농촌 간 구분의 점진적 철폐 10.아동들의 무료교육, 아동취로 금지. 교육과 산업생산 결합 등등.
    작성일시
    11.08. 18:28
    IP
    59.17.xxx.88신고하기
  • 아이디
    yjugremrin
    내용
    마르크스가 공산독재를 주장한적이 없다는 말은 천자문에 하늘천자가 없다는 말처럼 황당한 허구이다. 제대로 공부해보아라. 어느 이상한 사이비 교수한테 강의듣고 다아는것처럼 설치지 말고.
    작성일시
    11.08. 18:28
    IP
    211.49.xxx.119신고하기
  • 아이디
    yjugremrin
    내용
    혹자는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했지 공산당 독재를 주장하지 않았으니 레닌거랑 다르다고 하는데, 애시당초 권력을 가진 소수의 존재가 없이 독재가 성립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소리이다. 밥을 만드는데 물 없이 만든다는 것과 똑같은 소리이다.
    작성일시
    11.08. 18:30
    IP
    211.49.xxx.119신고하기
  • 아이디
    ishijibu
    내용
    토지의 사유재산권 금지, 교통, 통신도 국유화 은행도 국유화 공장도 국유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 의하면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물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사유재산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소유권에 기반한 공동점유라고 하시는데, 소유권의 특성은 특정 물건이나 권리를 배타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것인데 개인의 소유에 기반한 공동점유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배타성을 가지는 소유라는 개념과 상치되는 것입니다.
    작성일시
    11.08. 18:30
    IP
    59.17.xxx.88신고하기
  • 아이디
    ishijibu
    내용
    소유권을 공유의 형태로 만들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초적인 소유권을 가진 개개인의 의사에 합치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고 소유권자는 언제라도 그 공유의 형태를 해체하고 자신의 지분만큼 분리해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맑스가 주장하는 개인의 소유에 기반한 "꽁동점유"라는 것은 실질적인 소유는 존재하지 않고 단지 집단적 소유만을 인정하는 궤변에 지나지 않습니다.
    작성일시
    11.08. 18:33
    IP
    59.17.xxx.88신고하기
  • 아이디
    ishijibu
    내용
    꽁동점유->공동점유입니다.
    작성일시
    11.08. 18:34
    IP
    59.17.xxx.88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ishijibu님... 1. 토지사유의 금지..(레닌이 주석으로 붙여서 전세계에 널리 알리 거짓말). 모든? 아님... 토지임대료 수입의 공공목적 투자. 5번 역시 레닌이 가져다 붙였음. 그리고... 사회적 이라는 말이 모두 국가소유로 잘못 번역되어 있군요. 7번.. 레닌.. 8번... 산업예비군이라는 말만 있죠. 농업예비군.. 농업중심이었던 러시아에서 볼셰비키들이 갖다 붙인것... 9번... 마르크스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러시아 볼셰비키들이 러시아식으로 왜곡한거죠...
    작성일시
    11.08. 18:34
    IP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당시 러시아는 마르크스의 주 활동지인 영국과 달리 후진 농업국가였습니다. 10번 은 대략 맞는군요... 님... 마르크스의 원전이 성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왜곡된 건 알고 계신가요? 바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 주로.. 구 소련에서 퍼뜨린.... 그리고... 공동점유는 아주 쉽게 설명하면.. 개인이 시설을 소유하고 있고 사회적으로 공동으로 그 시설을 이용하며.. 임대료나 이용료를 내는 것입니다... 물론, 국가 기간시설에 대해서는 국가가 소유해야 한다는 건 맞습니다. 그 범위에 대해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케인즈는 물론. 현대의 선진국들 대부분이 이 정책을 취했습니다. 대처시절에도 영국에서 무상의료 였다는거
    작성일시
    11.08. 18:38
    IP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yukari313
    내용
    마르크스주의 알다만 사람들 많구만...그는 공산당 독재 주장했긴했지만 결국 소멸할거라 했습니다. 사실 공산주의 국가랍시고 마르크스가 주장한 공산당은 없었습니다. 걍 독재당들이었지...애초에 마르크스가 궁극적으로 그걸 주장할 수 없는게 그의 이상사회에선 당이 존재 할 수 없지요..
    작성일시
    11.08. 18:41
    IP
    68.180.xxx.122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에서 가능한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체제를 자본주의를 시작조차 제대로 못한 전제주의 러시아에서 하려니.. 엄청난 거짓말을 하게 된 거죠. 물론, 전적으로 마르크스가 글자 하나까지 맞다는 소위 교조주의는 안되죠.. 그러나, 우리 한국에서는 학문의 큰 줄기와 뿌리조차 왜곡시킨걸 알고 있습니다. 참 희안한 일입니다. 전세계에서 한국이 북한처럼 우물안 개구리인 경우가 여럿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마르크스에 대한 오해 입니다.
    작성일시
    11.08. 18:42
    IP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차라리 위의 yukari313님의 말처럼.. 마르크스는 정치에 대해서는 깊은 학문적 연구를 하지 못한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공산당 독재와 같은 이론을 넘어서 구체화된 전략은 마르크스에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작성일시
    11.08. 18:43
    IP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ishijibu
    내용
    소유권이라는 것은 사용,수익,처분권이 소유권자에게 배타적으로 귀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유권자에게 소유권은 있는데 아무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이름만 소유권이고 사실상 소유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본인의 물건을 사용하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면 그건 이미 소유권이 아닙니다. 그리고 생산시설같은 것을 임대료 내고 사용하는 것을 인정한다면 마르크스의 기본명제인 "가치는 노동으로부터 나온다"와 정면으로 반합니다. 마르크스는 생산시설을 소유한 자본가가 노동자를 낮은 임금으로 부려 잉여가치를 얻는 것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한 사람이고 자본론의 구조도 그것이 핵심입니다. 만약에 개인의 소유권에 기반한
    작성일시
    11.08. 18:45
    IP
    59.17.xxx.88신고하기
  • 아이디
    ishijibu
    내용
    공동점유라는 것을 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인정한다면 결국 임대료라는 것은 시장가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고 생산시설의 소유권자는 노동이 아닌 생산시설의 소유로서 임대료를 얻는 것으로 그가 비판한 자본주의와 큰 차이가 없게 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작성일시
    11.08. 18:47
    IP
    59.17.xxx.88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ishijibu 님 레닌이래 변질된 잘못된 정보를 읽은것 뿐만 아니라. 이분법적인 사고까지... 마르크스와는 정반대의 레닌적 사고방식입니다.... 노동이 원천이라는 것은 맞지만, 자본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은 전혀 아니거든요? 잉여가치의 분배에 있어서 절대적으로가 아니고 상대적으로 매우 저평가되어 있는 노동을 재평가 한 것이구요. 님이 아까부터 말하는 소유권 개념은 막스베버조차도 그런 개념이 아니고.. 아담스미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그야말로 원론적인 수준의 개념이죠.
    작성일시
    11.08. 18:51
    IP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마르크스는 관념론자가 아니라 경험론자 입니다. 이것도 아마 한국에서는 정반대로 알려져 있죠? 마르크스가 철저하게 비판한 이전의 유물론을 마르크스 유물론이라고 알고 있는 것처럼.
    작성일시
    11.08. 18:53
    IP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singsingshop
    내용
    흠-_- IT게시판갈것그랬나...내가아는기사 가서리플달아야겟다;
    작성일시
    11.08. 18:54
    IP
    221.138.xxx.136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또한 공산당선언은 마르크스가 가장 취약한 학문분야였던 정치부문에 대한 선언일 뿐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표현이 원론적, 추상적, 거칠게 되죠. 그럼에도 그 내용조차 레닌이 엄청나게 많이 농업국가인 러시아에 맞도록 변질시켰구요. 고타강령비판부터 시작해서... 엠에베를 한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보면 알게 됩니다. 아마 한국에서 마르크스 비판하는 학자들 대부분이 엠에베를 제대로 읽어본 사람 없을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공부한 당시에는 엠에베는 물론이고 자본론 조차 제대로 번역된 것을 한국이건 해외유학가서건 읽는건 금기시 되어 있었으니까.
    작성일시
    11.08. 18:56
    IP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ishijibu
    내용
    님 무슨 말씀하시는 것인지? 아담스미스의 개념이라뇨? 현재의 민법에서도 소유권 사용,수익,처분권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막스 베버가 소유권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했는지 몰라도 그 정의는 막스 베버만의 정의이고 과거, 현재 어느 때도 통용된 적이 없는 정의입니다. 도대체 사용,수익,처분권이 없는 소유권을 어떻게 소유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님은 마르크스를 제대로 안 읽으신 것인지 몰라도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말하는 것은 생산수단에 대한 소수의 소유가 다수의 노동자를 지배하게 되고 노동없이 벌어들이는 잉여가치가 자꾸 늘어나서 더 많은 생산시설을 소수의 자본가가 소유하게 되어 노동자가 소외된다는 것
    작성일시
    11.08. 18:57
    IP
    59.17.xxx.88신고하기
  • 아이디
    ishijibu
    내용
    입니다. 님이 말씀하시는 괴이한 형태의 공동점유라는 것이 소유의 최종형태라고 한다면 결국 생산시설을 소유한 소수의 생산시설 소유권자가 대량의 임대수익으로 인하여 마르크스가 타파하고자 하는 구도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임대료를 국가나 사회에서 마음대로 정하게 되면 그것은 이미 개인의 소유에 기반한다고 하는 소유권적 개념을 완전히 일틸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장질서까지 부인하는 것이고. 어떤 식으로 논리를 전개해도 개인의 소유에 기반한 공동점유란 개념을 모순적이고 붕괴될수 밖에 없는 논리입니다.
    작성일시
    11.08. 19:00
    IP
    59.17.xxx.88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막스베버의 정의가 현대 자본주의 고전학파와 케인즈 학파가 모두 수용하고 있는 정의 입니다. 마르크스 주의의 개인적 소유에서도 사용, 수익, 처분권이 모두 있습니다. 이것을 님처럼 오해한 대표적인 한국의 자칭 마르크스 주의자로 김소영 교수가 있죠.
    작성일시
    11.08. 19:01
    IP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기업의 소유는 노동자를 포함한 주주들 이고, 기업의 시설을 소유한 자본가는 임대수익을 얻는거고.. 그것을 처분할 수 있고. 이것은 모두 루소에 기반한 사회계약설에 따라 계약관계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 주의에서도 시장과 계약 자본 모두 존재합니다.
    작성일시
    11.08. 19:03
    IP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그리고, 막스베버의 주된 분야는 행정, 법, 사회학 입니다. 마르크스는 경제학이구요. 따라서, 소유권에 대해서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죠. 님이 글자 그대로 쓰신 소유권이 서구 현대 민법체계의 근간이 된것이 사실입니다. 마르크스가 무론 베버보다 이전 사람입니다만, 이런 기본조차 몰랐을리는 전혀 없겠죠?
    작성일시
    11.08. 19:07
    IP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그리고.. 물론 자본가도 주주일 수 있습니다. 엥겔스가 바로 그런 기업가 였지요.
    작성일시
    11.08. 19:09
    IP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ishijibu
    내용
    님, 만약에 마르크스주의에서 시장과 소유권이 모두 보장된다면, 지금의 회사형태도 모두 인정되는 것인겠지요? 생산시설의 소유자는 반드시 임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주주가 되어서 스스로 기업의 주인이 되면 됩니다. 님처럼 논리를 전개하면 현재상태와 다른게 하나도 없지요? 자본주의 상황에서 주식회사에서 제일 많이 이득보는 상황은 누굽니까? 시장과 소유권을 모두 인정하는 마르크스주의 하에서는 도대체 무엇이 달라집니까? 그냥 자본주의랑 똑같은 것입니다.
    작성일시
    11.08. 19:10
    IP
    59.17.xxx.88신고하기
  • 아이디
    ishijibu
    내용
    민법체계의 근간이 된 것은 물론 현재도 사용, 수익, 처분권은 소유권의 핵심내용입니다. 그냥 민법총칙이나 물권법만 읽어보시면 됩니다.
    작성일시
    11.08. 19:11
    IP
    59.17.xxx.88신고하기
  • 아이디
    ishijibu
    내용
    자본주의 형태하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인정되고 지금도 인정되며 흔하게 볼 수 있는 주식회사가 마르크스가 지향하는 소유형태라면 결국에는 마르크스의 이론은 무슨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군요?????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전혀 없습니다만?
    작성일시
    11.08. 19:13
    IP
    59.17.xxx.88신고하기
  • 아이디
    cjjoung
    내용
    liberosh < - ishijibu님이 잘 대답해주셔서 그냥 가만있지만, 대화를 할적에 넌 아무것도 모른다. 나만 다 아는거다 하면서 대화를 이끌면, 상대가 옳다쿠나 당신 말이 맞아 이렇게 말하리라 보는가? 우물안 개구리는 당신이라고 생각되는게 지난 글을 읽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도 당신이 말한책을 모두 다 읽었지만, 난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는데..ㅋㅋ 솔직히 좀 웃기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작성일시
    11.08. 19:15
    IP
    163.180.xxx.98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마르크스주의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고용관계가 아니라, 사회계약설에 따른 계약관계 입니다. 물론, 로크와 루소의 개념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루소 입장에서 보면 고용관계는 불평등계약이죠. 어쨌거나 시설임대업자라고 하면 이해가 편하시겠는지요. 자본가는 시설임대업자이고, 그 시설에서 발생한 수익은 노동자가 가져가고 그 남은것은 자본가도 노동자도 기타 그 사회의 구성원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주주가 가져가는 겁니다. 회사이윤의 대부분이 노동자에게 가는 것입니다. 자본가의 주 소득원은 시설임대료 입니다. 주식시장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좀더 복잡해 지겠지만, 주식시장에 대해 마르크스는 엄격한 세제를 적용하
    작성일시
    11.08.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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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112.xxx.235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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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jj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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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berosh <- 같은 책을 읽고다 다른 결론에 도달한 나는 당신에게 있어서 바보라고 할텐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작성일시
    11.0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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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3.180.xxx.98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ishijibu님... 맞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한 주식회사와 주식시장에 대한 개념이 현대의 발달한 자본주의 선진국가의 그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다만, 신자유주의 이전까지를 기준으로. 그런데, 마르크스주의가 없었다면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아시는지요? 좀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마르크스 주의는 보다더 합리적으로 보다더 정확하게 보다더 평등하게라는 정도의 문제이지. 자본, 시장등을 철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솔직히 현재 한국의 자본? 주의라고 조차 할 수 없는 천박한 수준하고 서구의 자본주의는 엄청난 정도의 차이가 있지요
    작성일시
    11.08.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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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ishijibu
    내용
    그러니까 주식회사의 형태라고 한다면 가지고 있는 주식의 지분비율만큼 수익이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결국에는 자본가가 노동자와 함께 기업의 주인이 된다면 자본이 월등한 자본가가 제일 많은 수익을 가져가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고, 결국에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달라지는게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시설임대업자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스스로 기업의 주인이 되어서 스스로 생산시설을 사용하여 수익을 창출한다면 그 수익은 자본가에게 귀속되지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설령 주식을 가지고 있어도 소수밖에 없는 노동자는 별로 수익을 얻을 수 없죠.
    작성일시
    11.08.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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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17.xxx.88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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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yuksu1
    내용
    어차피 이상적인 인간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국가는 사회주의 아닌가...그리고 노무현 정권을 좌파라 하는 이유는 망한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무능한 지도자가 지 멋대로 해서 나라는 망하게 하고 있기 때문임..ㅡㅡ 다른 하등의 이유는 없음...ㅎㅎ
    작성일시
    11.08.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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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141.xxx.74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제가 케인지언 중에 좌파라서 이런 해석을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케인즈가 마르크스주의를 구제적으로 비판해서 계승한 것이 현대 선진국이 거쳐간 수정자본주의 입니다. 한국이 수정자본주의를 못하고 이를 빨.갱이 사상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마르크스 주의에 대한 엄청난 오해때문이구요.
    작성일시
    11.08.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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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112.xxx.235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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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jk3033
    내용
    고용 = 계약. 고용도 즉 하나의 계약이라고 보는데. 마르크스 주의의 이상이 공산주의사회의 실현으로 알고있는디. -ㅅ-; 1당독재체제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면 지금 북한이 마르크스주의에서 이탈하고있단 소리가 되는건가.
    작성일시
    11.08.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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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6.120.xxx.207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아까 바로 위에 말에서 끊겼는데, 마르크스는 주식시장에 대해 님이 말한것처럼 엄격한 세제를 적용합니다. 통제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자본의 거래를 통해서는 그에 해당하는 즉.... 예를들면 펀드매니저의 노동이라고 할까요? 그런 노동에 대해서 평가되는 가치만을 가져가도록. 그러니까 자본으로 주식을 사는 것 보다는 시설을 소유하는것이 더욱 좋다고 판단하도록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수정자본주의에서 도입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마르크스 주의가 현실성이 있는가에 대한 중대한 문제이지요.
    작성일시
    11.08.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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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112.xxx.235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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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berosh
    내용
    mjk3033님과 hyuksu1 님... 망한 사회주의 국가나 북한은 마르크스 주의가 아니라 레닌주의조차 변질한 국가들이죠... 그리고, 레닌은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추진할 수 있는 마르크스 주의를 후진 농업국가에서 무리하게 하려고 하다가 첫걸음부터 잘못된 길로 가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진 거구요.
    작성일시
    11.08.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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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112.xxx.235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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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hijibu
    내용
    케인즈는 자본론을 읽고 난잡하고 지루하고 경제학적 영감이 전혀 없다고 평했습니다. 케인즈는 마르크스를 계승한 적이 없고 논리 자체도 완전히 다릅니다...
    작성일시
    11.08.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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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17.xxx.88신고하기
  • 아이디
    ishijibu
    내용
    아니요. 주식시장의 거래를 통한 양도소득세 같은 세제가 아니라요. 기업활동을 통한 수익을 기업의 주인인 주주가 가져가는 것 아니겠어요? 그건 주식거래를 세금으로 어덯게 해보겠다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보유지분만큼 기업이 얻은 수익을 배분하는 것이 원리니까요. 이렇게 한다면 마르크스가 말한 최종소유개념은 자본가의 지위를 더욱 공고하게 할 뿐입니다.
    작성일시
    11.08.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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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17.xxx.88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구제적 비판이란. 병충해 구제의 그 구제입니다. 즉, 마르크스 주의 중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일차적 위기였던 20세기 초의 공황을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을 계승했습니다. 논리 자체는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일부 받아들였으니 다르지요. 다만, 마르크스에 대해서 제가 아는 부분을 포함하여 그 이상 이해한 후에 그런 평가를 내렸지요. 저는 다시 말씀드리지만 케인지언이지 막시스트는 아닙니다. 케인즈가 더 현실적으로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케인즈 스스로도 마르크스보다 자신이 더 뛰어난 이론을 수립하려고 했고. 현실적으로 수립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제까지 경제학중에 수정자본주의를 능가하는 학문은 아직
    작성일시
    11.08. 19:33
    IP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기업활동의 잉여가치는 일차적으로 대부분 노동자가 가져가고 거기서 남은 것을 주주들의 수익배당으로 가져갑니다. 이것도 현실적으로 정치적인 합리적 이론과 전략이 없는한 참 힘든이야기이지요. 마르크스가 정치에 대해 언명한 부분을 틀린것은 고치고 하면서 잘 발전시켰다면, 가능했을 지도 모르는 이야기이지만. 어쨌거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 이지요.
    작성일시
    11.08. 19:35
    IP
    222.112.xxx.235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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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hijibu
    내용
    케인즈는 경제학에서는 마르크스와는 절대 비교할 수 없는 지위에 있습니다. 케인즈에 비하면 마르크스는 하류입니다. 케인즈와 비견될 수 있는 사람은 F.A.V Hayek나 Milton Friedman정도입니다. 다만 케인즈학파는 1980년 이후 독보적인 지위를 잃은 지 오래입니다.
    작성일시
    11.08. 19:37
    IP
    59.17.xxx.88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정리하면, 기업활동의 잉여가치 배분규모와 순서는 노동자>시설임대료>주주수익... 이런 순서인데... 이게 된다면 정말 현재의 자본주의와 엄청난 변화이지요..... 개인적으로 이상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구요... 왜냐면 노동자에는 마르크스가 예견한 것처럼 육체노동(또는 손노동)은 점차 사라지고, 지식, 정보, 경영능력으로 일하는 노동자가 늘어나 이들이 대다수가 되어야 한다고 했으니까... 기업의 경영, 기술연구도 발전하고.. 그러나.. 현실적으로 힘든이야기..
    작성일시
    11.08.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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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ishijibu
    내용
    기업이 소유한 생산시설의 사용에 의한 수익을 노동자가 대부분 가져간다면 이미 소유권이라는 개념을 상당히 왜곡하게 됩니다. 성립할 수 없는 견해입니다. 결국 마르크스의 이론을 치밀하게 전개한다면 그 실현방안은 생산수단의 국유화 밖에 없습니다. 사적소유에 기반한 공동점유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맑시즘과 맞지 않습니다.
    작성일시
    11.08.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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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17.xxx.88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네...케인즈학파는 독보적 지위를 가진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고전파에게 도전하는 입장이었고.... 1980년대 이후에는 국가 경제정책 입안에서도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밀려났지요. 그러나, 현재까지 나온 경제학중에 마르크스주의는 이상적으로 최고이지만, 현실성이 떨어지는.. 위의 두가지이유가 있고..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가 현실적으로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는 고전학파 마저도 이것도 경제이론이야 싶은 정도로 모든걸 포기하고 본능과 시장방임에 맡긴것이구요.
    작성일시
    11.08. 19:42
    IP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ishijibu
    내용
    1970년대까지는 케인즈가 짱이었습니다만.. 그때는 경제학자는 케인즈이전과 이후로 구분해야 한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프리드먼이나 하이예크가 주목 받으면서 80년대 이후 스러졌지만, 한때 독보적 지위에 있었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상호보완관계에 있지만 현재는 케인즈학파보다 네오리버럴쪽이 다수설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작성일시
    11.08.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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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17.xxx.88신고하기
  • 아이디
    clos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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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엔지니어는 시간이 남아도나?? 대학에서 맑스 강의를 듣고 공부하다가 졸업후에는 엔지니어 활동을 하면서 케인지언이 되었다라....liberosh....맑스를 읽긴 읽은건지...
    작성일시
    11.08.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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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1.47.xxx.59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ishijibu 님....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저도 말씀드렸구요... 그 구체적 전개방식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쌍선적 토론정치, 노동자계급의 지식과 교육 및 삶의 질, 이런것들이 구체적으로 가능한 고도로 발전한 민주주의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이를 무리하게 추진하자면 국가소유의 국가 사회주의같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과 정반대의 길이고.. 이건 마르크스가 목표로한 결과와 달리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 즉 마르크스는 경제학적 측면에서 대단히 합리적인 최상의 목표를 제시했으나, 그걸 하려면 고도로 발전한 민주주의가 있어야 하는데... 정치부분에 대한 그 스스로의 연구부족으로... 이상에 그치고 만 것이라 생각합니다.
    작성일시
    11.08.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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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ishijibu
    내용
    아무튼 수고하세요. 전 이만!!
    작성일시
    11.08. 19:47
    IP
    59.17.xxx.88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clossal 님. 엔지니어가 인문사회과학 교양이 없는게 맞는건가요? 좋은건가요? 한국에서 엔지니어는 그렇게 사는게 국가에 도움이 되나요? 무식한 대한민국이 그렇게 좋습니까?
    작성일시
    11.08. 19:48
    IP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liberosh
    내용
    ishijibu 님 네.. 좋은 의견 나누었습니다.
    작성일시
    11.08. 19:49
    IP
    222.112.xxx.235신고하기
  • 아이디
    clossal
    내용
    엔지니어가 인문사회과학 교양이 있는건 좋지만....괜히 어설픈 지식으로 혹세무민하는것보다 차라리 모르는게 좋을때도 있죠....님이 어느 분야 엔지니어인지는 몰라도 공학쪽도 만만한 곳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작성일시
    11.08. 19:51
    IP
    211.47.xxx.59신고하기
출처 블로그 > 공간과 시간, 인간의 흐름.
원본 http://blog.naver.com/jsch88/70022790919
전남대 철학과 교수 이 강 서




인문학의 위기인가

  한때 ‘인문학의 위기’니 ‘철학의 위기’라는 말이 두루 쓰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공계 위기’라는 말도 등장했다. 아니 이것도 위기 저것도 위기라면, 도대체 위기 아닌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위기’라는 단어가 본디 지니는 절박성을 누그러뜨려서 받아들인다. 그 까닭은 지금이 위기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인간, 세계 그리고 삶은 항상 위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현대’를 산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의 현대를 살았고, 칸트에게는 그의 시대가 현대였다. 오로지 한 시대를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시대를 각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살아 있으면서 자기의 시대를 태평성대로 규정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태평성대란 자신이 몸담고 있지 않은 지나간 시대를 회고적으로 바라볼 때에만 쓸 수 있는 말이다. 현재를 사는 인간이 과거의 어느 시대를 가리켜 태평성대로 부른다고 할지라도 그 시대는 정작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에게는 격동의 시대였을 것이다. 자기의 시대는 한결같이 위기인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니 ‘철학의 위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인문학과 철학은 예외 없이 위기이다. 플라톤,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칸트, 니체, 후설, 하이데거, 탈근대 혹은 후기근대론자 등이 위기를 말하는가 하면 우리는 우리 시대를 위기로 규정한다. 이렇게 볼 때 어느 시대를 놓고 위기냐 아니냐를 가리는 일이란 의미 있는 일이 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그 위기의 양상이 무엇이냐 하는 점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인문학 혹은 철학이 위기를 겪고 있다고 말할 때 그 위기의 양상은 어떤 모습일까? 도대체 어떤 점에서 인문학과 철학이 위기라는 것일까? 사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실로 여러 가지일 것이다. 논의를 진행시키기 위해 한 가지만 든다면 인문학이나 철학이 삶의 현장에서 점차 멀어지다보니 현실 연관성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마르크스는 ‘세상을 해석하는 철학’과 ‘세상을 바꾸는 철학’을 구별한다. 그는 지금까지의 철학은 세상을 이리저리 해석해 왔지만 앞으로의 철학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고 한다. 여기에서의 ‘철학’을 ‘인문학’으로 바꾸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꼭 마르크스가 아니더라도 사실 오랫동안 인문학 혹은 철학은 ‘삶의 기술’(ars vivendi, Lebenskunst)로도 받아들여져 왔는데 오늘날 이런 성격을 대폭 상실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인문학과 철학이 현실 연관성을 회복해야만 잃어버린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안락의자의 인문학자?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모은 책(E. Hamilton and H. Cairns, Plato: The Collected Dialogues, Princeton, 1961)의 서문에서 플라톤은 결코 바닥에서 천장까지 쌓인 책에 파묻혀 이론을 자아내는 ‘안락의자의 철학자’(armchair philosopher)가 아니라고 표현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널리 알려져 있는 ‘동굴의 비유’를 보아도 그렇다. 일생을 통해 손발과 목을 결박당해서 고개를 돌릴 수도 없이 벽만만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는 죄수들이 동굴 입구를 등지고 앉아 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 결박에서 풀려나서는 몸을 돌리고 동굴 밖으로 나온다고 생각해 보자. 동굴 바깥에서 태양 아래 빛나는 사물의 원래 모습을 보기까지 죄수는 가파른 동굴을 고통스럽게 기어올라가야 한다. 플라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 죄수가 다시금 동굴 안으로 기어 들어가 동료 죄수들에게 그들이 보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번도 결박에서 풀려나 본 적이 없는 그들이 이 말을 믿겠는가? 또 이 죄수가 동료들을 억지로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려 한다면 그들은 이 성가신 자를 없애려들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이 위험 천만한 일을 하다가 죽어간 사람이 소크라테스이다. 플라톤 철학은 이처럼 동굴 안에서 밖으로의 이데아 인식의 오름길과 다시 밖에서 안으로의 실천의 내림길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근현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면서 이와 같은 실천의 내림길이 철학과 인문학에서 대폭 약화된 것이다. 진리 인식의 오름길만 강조되고 실천의 내림길은 정당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철학 더 나아가 인문학의 정체성에 비추어 여간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일이 이 점과 관련해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여겨져서 좀 자세히 소개하려고 한다.




얼 쇼리스의 희망 수업

  2006년 5월 4일 서울의 성공회대학교에서 이색적인 졸업식이 열렸다. 40대에서 60대에 걸쳐 있는 13명이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을 마치고 학사모를 썼는데, 이들은 불과 1년 전만 해도 서울역 근처를 전전하던 노숙자들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노숙자들이 졸업한 것은 자활을 위한 기술 교육 과정이 아니라 인문학 과정이었다. 성공회 산하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와 삼성코닝이 공동으로 기획한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 제1기는 2005년 9월에 시작되었다. 40여명의 노숙자들이 입학신청서를 내고 면접과 심리검사를 받았으며 이 가운데 20명이 선발되었다. 이렇게 입학한 노숙자들은 철학, 문학, 역사, 예술사 그리고 글쓰기의 총 5과목에 걸쳐 주 3회 수업을 했는데, 13명이 졸업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학생들은 쪽방이나 월세방을 마련해 자활에 나서는 등 노숙 생활을 청산했다고 한다. 이들은 무료 급식을 꺼리게 되고 어떻게 해서든 음식을 스스로 만들어 먹거나 사먹으려 한다고 한다. 사람을 바꾼 힘의 원천은 인문학이었다. 사람과 세상을 바꾸는 철학 혹은 인문학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웅변하는 사례라고 하겠다.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의 뿌리는 얼 쇼리스(Earl Shorris)의 ‘클레멘트 인문학 과정’이다. 미국 시카고대학을 졸업한 얼 쇼리스는 언론인, 사회 비평가, 대학 강사, 작가 등 일인 다역의 활동을 해 왔는데, 무엇보다도 빈민 교육 활동가이기도 하다. 그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희망 수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빈곤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취재 중이던 얼 쇼리스는 1995년 뉴욕 교도소 죄수들을 대상으로 열린 ‘가족폭력예방 워크숍’에 참여했다. 여기에서 그는 살인죄로 8년째 복역 중인 할렘가 출신 여자 죄수와 마주 앉았다. 그가 사람들은 왜 가난한지 물었을 때 20대 초반의 여죄수는 정신적 삶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정신적 삶이 무엇이냐고 다시 캐묻자 이번에는 “극장, 연주회, 박물관, 강연 같은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렇게 말하는 여죄수의 눈빛은 얼 쇼리스가 1995년 최하층 빈민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클레멘트 인문학 과정’을 창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뉴욕에서 첫 과정을 시작했을 때 그의 시도는 주변으로부터 이해 받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하층 빈민들에게 빵과 잠자리를 제공한다는 것은 상식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오히려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그 당시에는 비상식이었다. 그는 마약 중독자, 노숙자, 전과자, 매춘부, 실업자 등 31명을 뉴욕 복지 시설 ‘로베르토 클레멘트 가족보호센터’에 모아 1주일에 이틀, 매번 2시간씩 철학, 문학, 역사, 예술, 논리학을 가르쳤다. 이때의 수업 장소를 따서 ‘클레멘트 코스’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간신히 글자를 읽을 정도인 학생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를 함께 읽었다고 한다. 5개 과목의 강사진은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었고, 수업은 강의식이 아니라 철저한 소크라테스식 대화와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강사와 학생은 동등한 입장에서 토론하며, 강사는 안내자 역할에 머문다고 한다. 첫 1년 코스가 끝났을 때 31명 가운데 17명이 수료증을 받았고 그 중 14명은 뉴욕 바드대의 심사를 거쳐 학점을 취득했다. 이들 중 2명은 나중에 치과 의사가 되었고, 1명은 간호사가 되었다. 한 여성 전과자는 약물중독자 재활센터의 상담실장이 되었고, 영문학 박사과정을 밟는 졸업생도 있다. 물론 중도에 탈락하는 학생들도 있었다고 한다. 탈락의 이유는 주로 에이즈를 비롯한 질병이었다. 얼 쇼리스가 이 일을 시작하도록 만든 바로 그 여죄수 비니스 워커도 감옥에서 석사 과정까지 마쳤지만 결국 에이즈로 세상을 떠났다.

  ‘클레멘트 인문학 과정’이 제공하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삶에 대한 성찰’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온갖 열악한 조건과 환경에 둘러싸여 있고, 그렇기 때문에 매사 즉각적으로 대응하기 십상이다. 인문학 과정은 이 사람들로 하여금 반성적 사고를 하도록 만들고, 이 반성적 사고는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싶다는 소망을 품게 만들었다. 새로운 ‘삶의 방식’(modus vivendi)에 대한 소망은 오랫동안 이들이 잊고 있었던 스스로에 대한 사랑과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일깨웠다. 이러한 일련의 선순환이 결국 사람을 바꾸고 나아가 세상을 바꾸기에 이른 것이다. 이미 고전이 된 영화 「벤허」에서 우리 주인공 벤허가 다른 노예들과 함께 전함의 노를 젓는 장면이 있다. 북소리에 맞추어 수많은 노예들이 일사불란하게 노를 젓는데 감독관들은 가차없는 채찍질로 독려한다. 여느 노예들은 채찍질을 당하면 비명을 지르면서 더욱 빠르게 노를 젓는다.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독관이 벤허를 매질했을 때 벤허는 그 감독관을 쏘아본다. 벤허의 이 눈빛을 기억하는가? 그때 감독관이 말한다. “너는 노예가 아니구나.” 벤허의 눈빛은 자유인의 눈빛이었다. 이 자유인의 눈빛은 깊이깊이 자신을 사랑하고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잃지 않는 데서 나온다.




인문학의 특별한 쓸모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우리 시대 우리 사회가 오해하듯 쓸모 없는 학문이 아니다. 인문학의 쓸모와 여타 학문의 쓸모가 다를 뿐이다. 아니 오로지 인문학만이 사람과 세상을 진정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런데도 인문학이 무엇에 기여하느냐는 비아냥은 표피적이고 계량적인 쓸모만을 알고 있다는 스스로의 천박성을 고백하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priceless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의 놀라움이 아직도 남아 있다. 보통 접미사 less는 ‘없다’, ‘결여’를 뜻한다. 그러니 priceless라면 값이 없다는 것이니 ‘별 가치가 없다’, ‘쓸모 없다’ 정도를 뜻할 줄 알았다. 어럽쇼. 그게 아니었다. priceless는 ‘너무 소중해서 값을 매길 수 없다’는 뜻이다. 잘 알아둘 일이다. 정작 중요한 것에는 가격이 없는 법이다. 철학을 위시한 인문학이 바로 그렇다. 만일 인문학은 쓸모가 없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이때의 쓸모는 여타의 학문이 내놓을 수 있는 쓸모를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인문학에는 그런 쓸모는 없지만 그 대신 다른 쓸모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얼 쇼리스는 인문학이 아니 오로지 인문학만이 자유로워지기, 일상을 새롭게 생각하기, 과거에 짓눌리지 않기,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등을 시작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다고 말한다. 인문학을 통해 성찰적으로 사고하고 자율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의 비참하고 절망적인 처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클레멘트 인문학 과정’은 현재 북미, 호주, 아시아에서 53개 코스가 운영된다고 한다. 지난 11년간 전 세계에서 가난한 사람 4000명이 졸업했고 최근에는 한 해 신입생이 12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얼 쇼리스는 더 많은 지역에 ‘클레멘트 인문학 과정’을 개설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클레멘트 코스를 다양화해서 나중에 일반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수강생들을 위한 특별 과정과 여성 노숙자들을 위한 과정을 따로 마련할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도 금년 5월말까지 제2기 학생을 선발한다고 한다. 노숙자에게 재활과 사회 복귀를 위한 생업이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을 가르친다는 발상은 도대체 인문학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의미 있는 도전이라고 하겠다. 얼 쇼리스는 올해 초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클레멘트 인문학 과정’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워크숍을 주관하고 돌아갔다. 또 2004년 8월 11일에는 KBS가 「가난한 자의 철학자 얼 쇼리스의 희망수업」이라는 보도 기획물을 방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이 의미 있는 일들은 여전히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이런 데에서도 적용되나 보다. 온갖 나쁜 것들은 그렇게도 빨리 퍼지더니만 두루 알려지면 좋을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만 하다.
장병두 할아버지, 상극의 성질 이용해 병 다스려'상대성 원리'가 핵심적인 의술… 과자·곤충 등 특이한 약재 사용도

102살의 할아버지, 불치로 알려진 다수의 중증 환자들도 치료. 무면허 의료 행위를 벌였다고 의료법 위반 혐의로 기소, 시민들의 탄원 운동 봇물….

‘현대판 화타’로 최근 뉴스의 중심에 떠오른 장병두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들이다. 화타는 중국 한나라때 독화살에 맞은 관우를 낫게 해 주고 조조를 치료하려다 암살됐다는 전설의 명의.

의사 자격증도 없고 정규 교육기관에서 의학 공부도 하지 않은 그는 어떻게 환자들을 고쳐냈을까? 의료법 위반으로 기소돼 사건이 현재 법원에 계류 중이지만 장병두 옹 의술의 비밀에 대한 궁금증은 아직 해소되지 않고 있다.

과연 장병두 할아버지가 가진 비법은 양방일까? 한방일까? 아니면 그 만의 독특한 방법이라도…? 안타깝게도 장병두 옹 의술의 실체에 대해 아직까지 뚜렷하게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다만 여러 환자들의 경험과 주변 인사들을 통해 흘러 나오는 일단의 사실들만이 종합되고 추론돼 전해지고 있는 정도. 할아버지 자신이 대외적으로 그의 비법에 대해 공개한 적도 물론 없다.

그럼에도 장병두 할아버지가 보인 의술이 여전히 세인들로부터 커다란 관심을 끌고 있는 이유는 그의 치료가 크게 효험을 발휘한 사례들이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손을 들었다’고 포기한 환자들이 그가 조제해 준 약을 먹고는 회복되는가 하면 그의 의술 덕에 만성병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결코 적지 않다.

물론 이와 반대되는 주장을 펴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법정 공판이 진행중인 지금도 그의 진료와 처방을 받겠다는 대기 환자들은 줄을 서 있는 상황이다.

‘상대성 원리’. 할아버지 의술의 핵심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딱 맞아 떨어지는 용어이다. 떡잎도 2장이듯 ‘살아 있는 모든 것에는 짝이 있다’는 데 할아버지 의술은 기반을 두고 있다.

그를 옆에서 지켜본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사항이기도 하다. 물론 아인슈타인이 주창한 상대성 원리와는 궤를 달리 한다.

일례로 출산 후 몸이 퉁퉁 붓는 증상에 시달리던 산모가 할아버지를 찾은 적이 있다. 원인을 모르고 찾았지만 산모에게 돌아간 대답은 뜻 밖에도 임신 중에 과자를 너무 많이 먹어 병이 났다는 것.

더 놀라운 사실은 할아버지가 지어준 약재 중에 과자가 들어갔다는 것이다. 과자로 인해 병이 났고 상대적으로 과자를 통해 병을 치유한다는 할아버지만의 비법에 의한 것이다. 물론 할아버지가 조제해 준 약을 먹고 산모는 다시 회복됐다.

“밥에 체하건, 술에 체하건 반드시 상극된 것이 있어!” 할아버지는 상대성 원리라고 단어를 직접 명시하지는 않지만 의술의 원리를 어렴풋하게나마 털어 놓았다.

장병두 할아버지가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쓰는 약재들 또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더더욱 극대화시키고 있다.

양방은 물론 전통 한의약에서도 일반적으로 쓰는 약재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곤충류나 과자가 약재로 쓰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밥이나 술도 약재로 들어 간다.

당연히 환자와 병환의 종류, 증세에 따라 달리 처방되는 것은 물론이다. 할아버지가 약재로 사용하는 재료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름 모를 약초들을 비롯해 40여 가지 이상 되는 것으로만 추정된다.

이처럼 ‘상상하기 힘든’ 평범하지 않은 약재가 사용되는 것 또한 할아버지만이 가진 비법에 의한 것이다. 때문에 장병두 옹의 의술은 병이란 인체의 어떤 장기나 부위가 균형을 이루지 못했을 때 생겨나고 치료는 그에 상극되는 성질을 가진 것으로 병의 근원을 차단하는 것으로도 요약된다.

장병두 할아버지가 환자들을 보고 진단하는 방식을 보고 나면 더더욱 신기하기만 하다. 주로 환자들이 방문을 열고 들어 오면 얼굴 표정과 걸음걸이, 몸짓 등을 훑어 보기만 한다고. 한의원에서처럼 맥을 짚어 보는 일도 없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환자의 등을 보면서 병을 진단한다는 점이다. ‘등을 돌리고 앉으라’고 하고선 목부터 허리까지 경추와 경혈을 따라 눌러 보는 것이 할아버지가 행하는 가장 직접적인 진료 형태이다. 간혹 입을 벌려 입 안을 살펴 보기도 한다.

할아버지가 환자들과 나누는 대화도 많지 않다. 밥을 못 먹는다거나 잠을 못자는 등 간단한 사항 외에 환자들에게 구체적으로 물어 보는 것도 없다는 점 또한 그를 옆에서 지켜 본 이들을 놀라게 하는 사실이다. 주변에서는 할아버지가 환자들로부터 ‘어디가 아프다’라는 얘기를 듣는 것을 거의 보기 힘들다고 전한다.

암선고를 받고 석달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형선고를 받고 장병두 할아버지가 지어준 약을 먹고 완치된 박태식 전북대 경제학부 교수는 소주 반잔을 마시고 할아버지를 다시 찾았다가 들은 한 마디를 아직도 기억한다.

친한 친구가 돼지 쓸개에 소주를 약간 타서 ‘몸에 좋다’고 마시라고 한 것을 마셨는데 이튿날 할아버지에게 약을 지으러 갔다 ‘술 마시고 왔소? 약 안 줄 테니 그냥 시요”라는 얘기만 들은 것.

박 교수는 “너무 할아버지의 의술을 신비화하는 것은 경계하고 있지만 어쨌든 놀라운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전한다.

할아버지가 약을 처방할 때 또한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진다. 일례로 ‘장하루 장장…’ 등 이상한 암호 같은 용어들을 할아버지가 불러 주면 옆에서 받아 적기만 한다. 무슨 약재인지, 어떻게 조제가 되는 지는 일반인들은 알 수 없는 일. 진료는 대략 5분 내외면 끝난다.

하지만 장병두 할아버지를 찾았다고 모두에게 약을 주거나 진료를 한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도 자신이 치료할 수 없는 병이나 환자에게는 선을 긋는다. ‘3개월 후 쯤에나 약이 들어 온다’고 돌려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걔 중에는 3개월 전후 사망하는 환자들이 적지 않다고. 할아버지가 환자를 보고 수명을 대부분 짐작한다는 것.

할아버지도 “아, 내가 아무에게나 약 줬다가 죽어 버리면 ‘내가 지어준 약 때문에 죽었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눈에 보이는데 그러면 난 (약) 못 줘!” 할아버지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자신의 약 처방 원칙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했다.

호적상 1906년생으로 돼 있지만 실제 할아버지의 나이는 102세이다. 어릴 때 등창을 심하게 앓기도 해 일찍 호적에 올리지 못하다 뒤늦게 올린 탓이다. 젊었을 때는 산야를 떠돌아 다니다가 일제시대에는 금광업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럼 할아버지는 어떻게 의술을 깨우치고 비법을 갖게 된 것일까? 의대를 다니지 못한 것은 물론 놀랍게도 동의보감이나 한의서를 따로 공부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 어릴적 한의사였던 외조부에게서 한의학을 어느 정도 접한 적이 있다지만 이것이 그가 가진 지금의 의술수준과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고 하기에는 무리이다.

“내가 치료하는 것을 보면 알잖아. 나도 다 연구한 거야. 학벌이 없고 (학교에서) 공부를 못한 것 뿐이지” 의술의 비법을 묻는 질문에 할아버지는 흥분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법원에서 내 의술에 원리가 없다고 과학적 검증을 하자고 해. 풀 잎사귀에 과학이 어디 있어. 들어 있는 독(성분)도 4번까지 성질이 변하는 데 그걸 알아?”

할아버지는 어릴 적 아픈 소를 지켜본 경험을 이야기했다. “소들이 평소 절대 안 먹는 풀이 있어 하지만 지가 죽을 때가 되면 알아서 그 풀을 뜯어 먹어. 난 그걸 바로 옆에서 봤지.

소도 아는데 사람만 몰라. 과학 과학 하는데 그게 진짜 (과학)이야!” 할아버지는 이어 “꽃이 필 때와 다 피었을 때 각각 약이 다르다”며 “그건 경험 안 해 보면 모른다”고 설명했다.

실제 할아버지는 예전에 “젊은 시절 실험을 한다며 죽인 소 돼지 닭 등의 수가 결코 적지 않다”고 털어 놓기도 했다. 본인이 경험하고 목격한 현상에도 개인적인 노력과 연구, 실험도 포함됐다고 볼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불가사의한 장병두 할아버지 의술의 비법을 후대를 위해 어서 전수 받아야 한다는 지적도 최근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할아버지가 100세가 워낙 넘으셔서 연로하신 것 또한 부담스러운 사실이기 때문.

하지만 할아버지의 의술이 간단히 설명되고 전달되기 쉬운 성격이 아니라는데 딜레마가 있다. 할아버지가 알고 있는 비법이 그가 겪은 여러 지식과 경험, 판단의 종합체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왜 자기만 알고 있고 남들에게 설명하지 못하냐? 그게 무슨 이론이고 과학이냐”는 지적이 제기되는 것도 결국 같은 맥락이다.

이에 대해 장병두 할아버지의 변호를 맡고 있는 박태원 변호사(법무법인 성실)는 “할아버지의 의술은 지식이나 단순한 경험 차원이라기 보다는 그 이상의 득도나 견성 같은 단어로 설명 가능한 부분이 없지 않다”고 설명한다.

박 변호사 자신도 “처음에는 그런 의술을 믿지 않았는데 할아버지를 보고 나선 쉽게 설명되지 않지만 ‘어떤 무엇가’가 있겠다”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 실제 할아버지가 행하고 거둔 치료 사례들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이라는 근거에서다.

“왜 자꾸 나한테 원리를 설명하라 그래? 내가 치료한 걸 보면 알잖아.” 할아버지는 과거 수 차례 자신의 비법을 전수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매번 실패한 것은 그 비법과 이론은 배운다고 아는 것이 아닌 ‘깨우쳐야만 알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할아버지 표현대로 ‘깨우치고 받아들일 혜안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

“내가 어떻게 오래 사냐고?” “일단 화를 내지 말아야 돼! 바른 마음도 중요하고…” 할아버지는 장수의 요건으로 소식을 하고 술 담배를 최대한 삼가라고 강조했다.

미국의언어학자촘스키의학설에따르면아기들은기본적으로언어를배울수있는장치를가지고태어난다고합니다.이장치는문법을습득가능하도록만드는장치인데,한번도들어보지못한말이라도문법에맞게말할수있다는거예요.이후의연구결과에따르면0~2세의영유아들이가장언어습득능력이뛰어나다는이론을확립시켰답니다.이후5~6세가지나면점점퇴화하기시작한데요.하지만,문자습득은좀다르답니다.문자습득에관해서는의견이분분해요.다만,아이가문자에흥미를느끼는때가바로적기라는것에는이견이없답니다.


제1단계:그것이무엇인지아는것이중요...

1.직접경험하도록하세요-놀이터에서나비를보았다면집에와서나비가그려진그림카드를보여주며"이건아까네가잡으려고했던나비야."아이는실제로본나비와그림카드에그려진나비,글자나비사이에뭔가관련이있다는것을알게된답니다.

2.손으로꼭꼭가르쳐주세요-그림카드를보고'전화기는어디있지?''강아지는어디있지?'하고물으면해당카드를아이가가리키는놀이를합니다.이놀이는아이가직접경험한사물이종이에인쇄된그림으로표현될수있다는것을알려주게됩니다.

3.반복해서이야기해주세요.



제2단계:글자와사물과소리의조화-아이가'사과'라는글자를알아보기위해서는먼저'빨갛고둥그스름한먹을것'과'사과'라는말소리,그리고'사과'라는글자사이에어떤연관이있다는것을알아차려야합니다.

1.그림카드를문자카드로

2.문자인지는좋아하는사물부터시작



제3단계:단어를가르쳐보세요-아이들은글자를하나씩따로떼어생각하지않아요.단지하나의단어로만인식하는거죠.따라서단어단위로가르쳐야겠죠.나비,사과,전화하면서말이죠.

1.낱말의구조를통해서-낱말구조의미세한차이까지느끼는단계입니다.이단계가되면아이는완전히낱말을안다고할수있습니다.그래서자기가아는낱말을신문이나잡지등에서골라내지적할수있습니다.'나비'를좋아하는아이가어느날엄마가보는신문에서'여기나비있다'라고지적하면아이는이제언제어디에서든지'나비'라는낱말을찾아낼수있을것입니다.그러나그렇다고해서'나'자와'비'자를따로알고있는것은아니라는걸명심해야합니다.



제4단계:감정표현을배워요-'개구리'라는단어를익히는것과'착하다'라는단어를익히는것은다르겠죠.'개구리'는눈에보이는구체적인단어이지만착하다는눈에보이지않는추상적인단어입니다.개구리는들판에데리고나가보여주고나안되면사진으로라도보여주면됩니다.하지만'착하다'는것은어떻게보여줄수있을까요?

1.소리나몸짓을사물과연결시킨다.

2.형용사카드짝짓기를한다.



제5단계:재미있는동화읽기로한글쏙!-동화읽기는단어학습을문장학습으로이끄는데좋은도구가된답니다.낱말카드로단어학습만
하는아이는한글을다알고있는것처럼보여도실제로문장을읽는것은또다른거랍니다.

1.내용을외울수있을정도로많이읽어준다

2.엄마가읽고아이는페이지를넘깁니다

3.한문장씩교대로읽어봅니다

4.한어절씩교대로읽습니다
그대 화났군요. 마음을 진정하시오. 남을 비방하려면 반드시 자기마음을 해치면서 독이 뿜어져 나오는 법이니까. 그리고 자꾸 생각이 부정적으로 바뀐다오. 나도 한때 그랬었는데, 이제부턴 마음을 바꾸기로 했고. 항상 긍정적인 측면만 보면서 살아가기로. 왜냐면 부정적인 생각은 순식간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더군요.진정하시고 평안한 밤 되시오.
왜당신과내가사느냐?"고

"어떻게살아야하느냐?"고굳이따지지마시게

사람사는길에

무슨법칙이있는것도아니고

삶과사랑에무슨공식이라도있다던가?

"왜사느냐?물으면,그냥당신이좋아서."

어떤이의시처럼














푸른하늘에두둥실떠있는한조각흰구름

바람부는대로떠밀려가면서도

그얼마나여유롭고아름답던가?












너의소중한사랑을지켜주고

남의사랑탐내는짓아니하고

당신의마음아프게아니하고

당신의눈에슬픈눈물흐르게하지아니하며

물흐르듯,서로의가슴에사랑흐르게하며

그냥그렇게,

지금까지살아왔듯이

살아가면되는것이라네.













남을부러워하지말게

알고보니,그사람은그사람대로

나보다더많은고민이있고

근심걱정나보다열배백배더많더군.












,검은돈탐내지말게

먹어서는아니되는그놈의돈받아먹고

쇠고랑차는꼴,한두사람본것아니지않은가?

받을때는좋지만

알고보니가시방석이요

뜨거운불구덩이속이요

그곳을박차고벗어나지못하는그네들이

오히려,측은하고가련한사람들이더군.












캄캄한밤,하늘의별세다가

소쩍새울음소리자장가삼는,

가진것별로없는사람들이나

휘황찬란한불빛아래

값비싼술과멋진음악에취해흥청거리며

가진것많이내세우는,있는사람들이나













하루세끼먹고자고깨고투덜거리고...

아웅다웅다투며살다가

늙고병들어북망산가는것은다같더군












한푼이라도더얻으려발버둥치고

한치라도더높이오르려안간힘한다고

100년을살던가1000년을살던가?












들여마신숨내뱉지못하고

눈감고가는길모두버리고갈수밖에없는데...

가는길뒤편에서손가락질하는사람너무많고












발길돌아서면

가슴에서지워질이름하나,남기면무엇하나

알고나면모두

허망한욕심에눈먼어리석음때문인것을.......

[vol 1, 2, 3] + 초인생활 하권[vol 4, 5])
Life and Teaching of the Masters of the Far East

 

초인생활(Life and Teaching of the Masters of the Far East)에 보면 포라타트상가 사원(The Temple Pora-tat-sanga)에서 '요기 산티'가 道力(=하나님의 창조력)으로 평평한 큰돌위에 사람들을 앉히고 여러번 공중부양을 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초인생활을 보고 저러한 대사들을 만나 뵙고 싶다는 생각으로 현재 이민까지 하면서 그들을 찾아 헤매는 분들도 있다.
초인생활에 나오는 에밀대사나 에밀대사 모친, 찬더센대사, 자스트대사, 네푸로대사, 예수佛, 그리고 "요가난다"에 나오는 크라이스트 바바지같은 대도인들을 만나뵐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지리적 근거는 포라타트상가 사원, T자형 사원(tau cross temple), 치유의 사원(The Healing Temple), 하스티나푸르(Hastinapur), 지구행성의 진정한 중앙정부인 '샴발라(Shambhala)'로 가는 핵심통로중의 하나인 고비사막 등이라고 할 것이다.
위의 지명들은 은유적인 표현이거나 이미 오래되어 사라진 지명이라서 쉽게 찾을 수 없는 곳들이었지만 이제 GBC그룹에서 그 해답들을 제시한다.

 

포라타트상가 사원(The Temple Pora-tat-sanga)은 초인생활에는 티벳에 있는 사원으로 나와있으나, 지금은 부탄의 파로 계곡(Paro Valley)에 위치한 탁상 사원(Taksang Monastery)이다. 보통 파로탁상이라고도 하는데 '포라'가 '파로'로 '타트'가 ''으로 '상가'가 ''으로 전이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 사진 및 설명 참조)

하스티나푸르(Hastinapur)는 지금의 Krukshetra(크룩셰트라 또는 크룩쉐트라)이다. 인도의 수도 델리에서 차로 몇시간 안걸리는 위치에 있으며, 지금은 나체수행의 전통을 가진 자이나교 등 많은 명상사원들이 들어서 있고, 특히 밤하늘이 너무도 찬란하며, 아름답다.

샴발라(Shambhala)의 통로는 여러군데가 있으나 모두 일반인들은 들어가기가 매우 난해하다. 아주 가끔씩 샴발라의 매스터들에 의해 초대받은 사람들에 한해서만 방문이 허용되곤 하였다. 샴발라(Shambhala)는 지구행성의 영성진화를 담당하는 진정한 중앙정부로서 神智學(Theosophy), 티벳 밀교 등 '秘敎(비밀교의)' 계통 등에서 매우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

 

위에 언급한 정도만으로도 확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러한 장소들을 발견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장소에 간다 하더라도 대사들이 자신을 일부러 드러내지 않는한 대사들을 알아보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실질적으로 거의 불가능할것이다. (물론 현장에서 마을사람들에게 수소문하는 방법도 있지만 결과는 미지수이다.)

여러분이 찾는 대사들은 여러분들이 여행할 때 무심코 소를 몰고 지나가던 아저씨이거나, 옆에서 물긷는 아주머니이거나, 여러분이 머물었던 허름한 여관의 주인이거나, 무례하면서도 위풍당당하게 자기가 먹은 식대 또는 자기의 차비를 처음 보는 당신에게 요구하는 낯선 나체수행자일 확률이 훨씬 높지만, 그분들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한 절대다수는 그분들을 알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 진실로 그분들을 뵙고 싶다면 진실로 下心하는 자세로 일관하는 것이 만나뵐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는 지름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주 많이 下心한다고 해도 그 정도는 웬만한 수행자가 下心하는 것에 훨씬 못미치기 때문이다.
{여기에 下心卽道의 온전한 깊은 뜻이 담겨있다.}

그분들을 진실로 만나 뵙고 싶어서 열심히 찾는 가운데 道心이 깊어지고 깊어져서 마침내 그분들을 뵙고서 성불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으며, 부처는 나의 마음속에 이미 존재한다는 강한 확신과 신념으로 수행을 통하여 마침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를 성취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法眞性은 "부처는 나의 마음속에 이미 존재한다(GOD I AM = 自性本來佛)"는 강한 확신과 신념으로 수행할 것을 강추(강력 추천)한다.

절벽에서 몸을 날려 신심을 증명하라는 크라이스트 바바지의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여 초탈자의 반열에 오른 분도 계시며, 나병에 걸린상태에서 맨발로 '강가'(갠지스 강)까지 긴 여정을 끝내고 도착한 순간에 나병이 말끔히 사라진 분도 계시며, 또한 '丹'의 주인공 봉우 권태훈 옹이 각고의 노력끝에 마침내 대도인 왕진인을 만나뵙고 수행공력이 상승하게 된 사실 등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런데, 참고로 그러한 대도인들은 어느 특정지역에만 존재하는것은 아니며 한국내에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는 바로 그대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현존하고 있다.

진실로 모든 것이 원만구족한 수행법이로다!!!
신실한 善男善女들에게 福이 있을지어다!!!

포라타트상가 사원(The Temple Pora-tat-sanga)

Taktsang is the most holy temple in Bhutan



It is a large cave several thousand years old 2-3 days walk up into the Himalayas from the China side in the disputed area where the countries come together. It is also referred to as The Stone Temple as it has been used by Tibetan Buddhists for more than 1,000 years.

The sound of the universe has continued from there for eons along with some other interesting phenomena which western minds can not accept.

even speaking with people, overseas and locally, that had actually been to the temple Pora-tat-sanga, (the temple burnt down back in March of 1998.
It is now called
Tak Sang , Tak Sang Monastery or goes by the name Tiger's Lair{호랑이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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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O VALLEY
Altitude: 2,250m / 7,382ft.

A trip to Bhutan normally begins and ends at Paro ..... and there can be few more charming valleys in the kingdom. As you disembark your Druk aircraft and take your first breath of Bhutanese air, you will be struck by the clean air and peaceful atmosphere.

National Museum.
The museum's collection includes ancient Bhutanese arts and artifacts, weapons and stamps, birds and animals, and an incredible collection of silver tea ware. This is typical of the eclectic beauty of Bhutan - its prized objects bear little relation to each other but as a whole stand together as a history of one of the world's most pristine people.

Taksang Monastery
It is said that Guru Rinpoche (Precious Master), the father of the Bhutanese sect of Mahayana Buddhism, arrived in Paro Valley more than a millennium ago on the back of a legendary tigress. He meditated for three months in a cave where a monastery was later built and called
Taktsang Lhakang or Tiger's Nest Visitors to Paro can take a closer look

at the monastery by ascending either on foot or by pony for about three hours to Tiger's Nest. Walkers can enjoy a rest at the Taktsang Teahouse situated at a wonderful vantage point overlooking the monastery. On clear days you can get a clear view of mount Chomolhari the sacred peak of Bhu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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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tsang monastery built on a sheer cliff face, 1000 meters above the Paro valley, is the most venerated spots in all of Bhutan.

Taksang Monastery also known as the Tiger's Lair or Tiger nest(호랑이굴 또는 호랑이 보금자리).



파로탁상은 우리나라의 불국사처럼 부탄을 상징하는 사원으로 엽서의 사진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깍아지른 절벽에 세워졌다. 우리나라 금강산에도 절벽위에 보덕암이라는 암자가 있지만 파로탁상의 규모가 훨씬 크다.

걸어서 올라가는데 약 3시간이 걸리는 이 파로탁상호랑이 굴이라는 뜻인데 파트마 삼바바와포체가 8세기에 지을 때 원래 호랑이 굴이었던(지금도 호랑이 굴과 호랑이가 다니던 길이 남아있다.) 이 바위굴에서 파트마 삼바바가 기도와 명상을 하자 호랑이가 물러갔다고 한다.

부탄 사원의 법당들이 1층뿐만 아니라 2층, 3층에도 있고 각층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이 파로탁상도 사다리와 굴들을 이용하여 이곳 저곳을 가야한다.
파트마삼바바가 명상했던 석굴은 2-3사람이 겨우 들어설 수 있는데 이 안에는 라마의 상이 있다.

Life and Teaching of the Masters of the Far East(超人生活) 원문


contents listing(목차)


volume1(1권)

volume2(2권)

volume3(3권)

volume4(4권)

volume5(5권)


평범한 인생을 살던 저자가 어느날 인도에서 우연히 만난 에밀이라는 선사를 따라 시작된 3년 6개월간의 신비로운 영적 체험을 그대로 서술한 책. 수천년 전부터 인류에게 영원한 진리의 빛을 비추고 있는 ‘성형제단(the Holy Brothers)’이라는 일련의 그룹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보고 들은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불사不死의 존재로 인류의 삶을 수천년동안 지도해 왔다는 그들의 놀라운 기적과 지혜를 담아내고 있다. 물질 위주의 세계관이 전 세계적인 규모로 확산되어가던 19세기 말~20세기 초에, 광대무변한 영적 능력의 세계가 실존한다는 것을 입증한 뜻 깊은 기록으로, 모든 종교적 종파와 동서양의 간극을 뛰어넘는 ‘영적 세계시민주의(spiritual cosmopolitanism)’의 씨앗을 심은 고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베어드 T. 스폴딩 저/정창영, 정진성 역
책 소개

모든 시대의 진정한 가르침은 ‘지금 여기’ 자신의 마음에 있다!
필멸과 불멸 사이, 물질세계와 영적세계 사이, 믿음과 의심 사이, 그리고 신과 나 사이에 있는 것과 없는 것……
이 책 한 권에 모든 시대의 진정한 가르침을 집대성한다!
이 책은 그동안 인간 존재의 참자아와 참살이에 대한 구도를 행한 이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던 <초인생활>의 증보판으로, 기존의 1-3부에 4-5부를 더해 그 가르침과 가치의 깊이를 한층 더하였다.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의 완전함을 인정한다면 그대로 완전해진다.
우리가 그와 같이 인식한다면 바로 신이 된 것이다. 그 외의 다른 것은 필요 없다.

이 책은 3년 반에 걸쳐, 인도, 히말라야, 티베트, 중국 일대를 돌아다니며 탐사 활동을 벌인 저자 자신의 체험기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불가사의한 이야기투성이이다. 하지만 “실제가 허구보다 훨씬 더 놀랍다.”라는 저자 자신의 말처럼, 우리의 생명과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면을 간직하고 있다. 이 점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이 책을 통해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들을 수도 있으리라.

<초인들의 삶과 가르침을 찾아서>에 대해서 말하다
불멸의 영혼과 육체를 지닌 채 물질세계의 법칙을 뛰어넘는 기적을 행하는 히말라야의 초인들-
그들이 펼치는 기적과 초월의 불가사의한 세계를 생생히 재현한 놀라운 기록!

1894년 말, 저자 스폴딩을 포함한 11명의 미국인들은 인도에서 우연히 만난 ‘에밀’이라는 기이한 인물의 안내로, 불가사의하고 신비한 영적 탐사활동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인도, 티벳, 중국에 걸쳐진 히말라야 산맥의 고지에서 1897년 초까지 3년 6개월 간 계속된 영적 탐사를 통해 스폴딩 일행은, 수천 년 전부터 인류에게 영원한 진리의 빛을 비추고 있는 ‘성형제단(the Holy Brothers)’의 영적 스승들과 만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온갖 놀라운 기적들을 자유자재로 행하는 불사不死의 존재들이었다. 이 책은 그들과 밤낮을 같이하며 목격한 사실들을 생생하게 적은 살아있는 기록이다. 공중부양, 유체이탈, 원격이동, 부활과 치유의 기적, 물 위를 걷는 기적, 상념만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내는 창조의 기적,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예수 및 붓다와의 만남 등 상식세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기독교 세계에 일대 파문을 던졌다.
스폴딩은 사실 여부에 대한 뜨거운 논쟁 속에서 수많은 강연회를 통해 이 책의 내용이 ‘믿어지진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사실’임을 밝혔으며 계속 이 기록을 공간公刊했다. 이 책 <초인들의 삶과 가르침을 찾아서>는 물질 위주의 세계관이 전 세계적인 규모로 확산되어가던 19세기 말~20세기 초에, 광대무변한 영적 능력의 세계가 실존한다는 것을 입증한 뜻 깊은 기록으로, 모든 종교적 종파와 동서양의 간극을 뛰어넘는 ‘영적 세계시민주의(spiritual cosmopolitanism)’의 씨앗을 심은 고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처음에 우리는 모든 것을 의심했다. 그러나 탐사를 마치고 난 후 우리는, 유구한 세월 동안 인류에게 진리의 빛을 던져주고 있는 불멸의 초인들이 실존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이 가르치는 진리는 서양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는 것이지만, 사실상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동양인들은 이미 이 진리를 알고 있었으며, 또 지금도 배우고 훈련하고 있다. 인류는 이제 신에 대한 낡아빠진 관념에서 벗어나고 있다. 사후에 받게 될 천국의 보상을 위해 착한 사람이 된다거나, 영원히 비파를 연주하며 시편을 노래하는 특권을 얻겠다는 믿음이 저급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신은 ‘지금 여기’ 우리들 속에 살아 있다.”

지은이 소개

베어드 T. 스폴딩 (Baird T. Spalding)

미국인이며, 광산기사였고, 1953년 95세를 일기로 애리조나 주 템프에서 사망했다는 사실 외에 그에 대한 대부분의 것은 베일에 싸여 있다. 인도, 티베트, 히말라야 고원 일대에서 초월적 능력을 일상적으로 행하는 경이로운 초인들의 삶과 가르침을 낱낱이 기록한 이 불가사의한 책을 통해 그는 신비주의 현상을 탐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영적 진리의 빛을 탐사한 선구자로 추앙받는다.스폴딩은 사실 여부에 대한 뜨거운 논쟁 속에서 수많은 강연회를 통해 이 책의 내용이 ‘믿어지진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사실’임을 밝혔으며, 계속 이 기록을 공간公刊했는데, 결국 인간이 이땅에서 육체를 입고 살면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에 대한 그의 깨달음을 공증한 이 책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세계 각 곳 정신과학이나 진리를 공부하는 모임에서 교재로 사용될 정도로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지며, 지금까지도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들에게 꺼지지 않는 영적 불길을 일으키고 있다.


예수佛의 기도(Prayer of Jesus Buddha) - "초인생활 vol.3" 중에서

빛.

“나의 아버지 하느님이여, 제가 당신의 장중한 침묵 속에 홀로 서 있을 때 저의 내면에서는 순수한 빛이 발합니다. 그 빛은 제 존재 전체를 세포 하나 하나까지 광휘로 채웁니다. 저의 내면의 영역은 생명과 사랑과 능력과 순수함과 아름다움과 온전함으로 충만합니다. 저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빛의 중심을 응시하면 물과 같이 부드러우며 빛나는 황금처럼 찬란한 또 다른 빛이 보입니다. 그 빛은 제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신적인 불을 산출하면서 동시에 흡수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하느님이며 하느님의 우주 전체와 하나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속삭이고 있는 저에게는 아무런 불안이 없습니다.”

침묵 속에서도.

“이 완전한 침묵 속에서도 하느님의 위대한 역사(役事)는 계속됩니다. 나는 동요하지 않으며 완전한 침묵이 나를 감싸고 있습니다. 이제 이 빛의 광채가 하느님의 광대한 우주로 퍼져 나가, 내가 아는 모든 곳에는 의식(意識)있는 하느님의 생명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시 두려움 없이 말합니다. 내가 하느님이라고. 그리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높이고 하느님을 찬송합니다. 내 노래에는 영감이 흘러 넘치며, 내 속에서는 위대한 어머니께서 새 생명을 노래하는 소리가 날마다 점점 더 크고 명확하게 들려옵니다. 흘러 들어오는 영감은 나의 의식(意識)을 하느님의 리듬과 조화를 이룰 때까지 고양시킵니다. 나는 다시 그리스도를 높이며, 기쁨의 노래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입니다. 내 노래의 주조는 조화이며 내 노래의 주제는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내 노래를 진실이라고 증거해 주십니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노라.
“아버지 하느님, 저는 당신의 성령의 빛으로 해방되었나이다. 당신의 증거의 인(印)이 제 이마에 찍혔고 저는 그것을 받아들이나이다.
아버지 하느님, 제 손에는 당신의 등불이 높이 들려졌고, 저는 또다시 그것을 받아들이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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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GHT

“As I stand alone in Your great silence, God my Father, in the midst of me there blazes a pure light and it fills every atom of my whole being with its great radiance. Life, Love, Strength, Purity, Beauty, Perfection, stand forth in all dominion within me. As I gaze into the very heart of this light, I see another light—liquid, soft, golden-white and radiantly luminous—absorbing, mothering and giving forth the caressing fire of the Greater Light.

“Now I know that I am God and one with God’s whole universe. I whisper to God my Father and I am undisturbed.

STILL IN THE SILENCE

“Yet in this complete silence there exists God’s Greatest Activity. Again, I am undisturbed and complete silence is all about me. Now the radiance of this light spreads to God’s vast universe and everywhere I know there is God’s conscious life. Again, I say fearlessly, I am God; I am silent and unafraid.

“I lift the Christ high within me and sing God’s praise. In the tones of my music inspiration hums. Louder and louder within me the Great Mother sings of new life. Louder and clearer with each new day, inspiration is lifting my conscious thought until it is attuned to God’s rhythm. Again, I lift the Christ high and give close ear that I may hear the glad music. My keynote is harmony and the theme of my song is God and God seals my song as Truth.

BEHOLD I AM BORN ANEW,
A CHRIST IS HERE

“I am free with the great light of Your Spirit, God my Father, Your seal is placed upon my forehead. I accept.

“I hold your light high, God my Father. Again, I accept.”


乙酉年 2005.1.25. 法眞性

"지나치게 색깔을 즐기다 보면 결국 시각 장애를 일으킨다. 지나치게 음률을 추구하다 보면 청각 장애를 일으킨다. 지나치게 입맛을 즐기다 보면 미각을 상실하여 입맛을 잃는다."
law308
2006-02-14 02:16
내용추가난 군대에서 절대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 너한테 개 새끼라는 말을 들을 이유도 없고 너같은 놈이 나에게 뭐라고 할 자격도 없다. 나를 때린 고참은 내 앞에서 울었고 무릎꿇고 사과했다. 난 아무도 맞지 않는 내무실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내 후임들은 모두 나에게 감사했다. 내가 용기가 없어서 맞은 줄 아니? 난 폭력을 되물림하지 않고 내대에서 끊었다. 난 법을 공부해...사람을 위해서야...싸움...??음의 치기어린 열정이라고 생각해...한 두 녀석 때리고 감빵가느니 참고 좀더 멀리 보고싶어...그게 진정한 남자가 가져야할 큰 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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